2장. 지역정당체제 이전의 지역주의
1. 지역정당체제는 필연적이었나
잘 알다시피 한국에서 지역주의가 본격적인 논란이 된 것은 민주화이후이다. 물론 그 이유는 1987년 대선에서부터 지금까지 모든 선거 결과가 지역에 따라 큰 편차를 보여 왔기 때문이다. 앞서도 이야기 했지만, 이에 대한 우리사회의 지배적인 설명은, 지역주의적 선호를 갖는 유권자가 각각의 지역당을 선택한 결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기존의 어느 연구도 이것이 민주화이후 새롭게 나타난 현상이라고 보지 않는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민주화 훨씬 이전부터, 지역정당체제 즉 지역을 분획선으로 하는 정치적 경쟁의 구조가 등장할 수 있는 인과적 조건이 이미 구조적으로 확립되었다는 것이다. 사실일까?
이 장의 목적은 제한적이다. 그것은 민주화 이전부터 유권자가 지역주의 투표를 했고 민주화이후의 선거 결과는 그 연장선일 뿐이라고 보는 기존의 설명 모델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지역을 분획선으로 하는 정치적 경쟁의 구조는 민주화이후 만들어진 ‘새로운 문제’로 정의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실제로 지역정당체제가 민주화를 기점으로 어떻게 형성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다음 3장에서 자세히 살펴보게 될 것이다.
다시 기존의 설명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한국에서 지역주의 연구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김만흠(1991, 116)은 민주화가 지역정당체제로 귀결된 것은 ‘예견된’ 결과라고 말한다. 이미 그 전에 지역균열이 구조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란다. 한국 정당의 지역파벌적 성격과 지역주의 동원을 강조하는 접근의 경우 역시 민주화를 기점으로 한 지역정당체제의 등장은 ‘필연적’인 것으로 이해한다(문용직 1992, 16). 지금껏 이들의 주장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기존 연구에서 강조하는 지역차별의 구조는 두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지역차별의 사회경제적 차원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심리적 차원이다. 지역균열의 사회경제적 차원을 구성하는 것은 영남의 수혜와 호남의 배제가 짝을 이루는 지역개발과 엘리트 충원에서의 지역차별이다. 경제개발과 엘리트충원에서의 지역차별은 기득권수호를 동기로 한 영남유권자의 영남당 지지경향으로, 소외의식에 기초롤 둔 호남 유권자의 호남당 지지경향을 강화시킴으로써 영호남 유권자의 투표결정을 정반대의 방향으로 움직이게 한다(김만흠 1991; 남영신 1991; 황태연 1997; 조기숙 ).
지역균열의 사회심리적 차원은 호남인에 대한 비호남인의 부정적 지역편견이다. 이는 호남출신 후보에 대한 지지가능성을 낮추는 효과를 갖는 것으로, 비단 영남 유권자만이 아니라 충청, 경기, 강원 등 비호남 유권자의 투표성향을 영남 유권자의 투표결정에 편승하게 하는 효과를 갖는다(김만흠 1991; 황태연 1997; 이남영 1998). 따라서 기존 연구에서 지역균열은 영호남간의 균열과 호남과 비호남 간의 균열이라는 두 차원이 중첩되어 있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러한 논리에 바탕을 두고 기존 연구는 민주화 이전의 선거와 관련해서 다음의 세 가지 핵심적인 주장을 발전시켰다.
첫째, 1971년 대통령선거는 “영호남간 대립에 의한 지역균열과 호남 비호남의 지역균열이라는 이중적 정치균열 양상이 나타나고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한국사회 지역균열의 전형으로 존재”한다는 주장이다(김만흠 1991, 114).
둘째, 지역차별구조의 효과에 의해 1971년 이후 선거에서 “집권세력의 영남지지기반화 현상이 강화”되어왔다는 주장이다(김만흠 1991, 113).
셋째, 민주화는 권위주의 시기 ‘민주 대 독재’ 라는 보다 강한 정치균열에 의해 잠시 억제되었던 지역균열을 폭발적으로 표출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가 지역정당체제로 나타났다는 주장이다(김만흠 1991; 문용직 1992).
이 세 주장은 경험적으로 증명될 수 있나? 지역정당체제의 등장은 민주화 이전 유권자의 지역주의 투표성향의 연장으로 해석될 수 있나?
2. 1971년 대선과 지역주의
기존 연구에서 1971년 대선을 지역주의 선거로 해석하는 근거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집합자료이다. 그것은 영남지역에서 박정희 후보가, 호남지역에서 김대중 후보가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다. 1971년 대통령 선거는 지역지배(혹은 패권)체제의 수호와 이에 대한 도전으로 정의되고, 그 결과 호남에서 김대중 후보가 62.3%를 득표하게 된 반면, 영남에서 박정희 후보가 71.1%를 득표하고, 동시에 호남지역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식에 의해 경기, 강원, 충북, 충남 지역에서 박정희 후보가 이전 선거에 비해 각각 +7.9%, +8.5%, +10.7%, +8.1% 씩 지지율을 증대시켰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선거운동과정에서 두 후보 진영이 지역주의를 경쟁적으로 동원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근거는 비교적 시각을 결여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이전 선거에 비해 지역별 득표율이 얼마나 변화되었으며, 다른 이슈에 비해 지역이슈가 얼마나 큰 비중을 갖는 것으로 변화되었는가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를 중심으로 실제의 상황을 살펴보자.
먼저 1971년 대선이 지역주의 선거였다면, 다시 말해 그 이전 충청출신 윤보선 후보와는 달리 지역차별구조의 핵심지역 출신인 김대중 후보의 등장에 의해 지역주의 경쟁이 압도적인 효과를 가졌다면 집합자료의 결과는 다음과 같이 나타나야 할 것이다. 먼저 박정희 후보의 경우는 1967년 대선 결과에 비해 호남에서 지지표를 상당부분 상실하고 경북과 경남에서는 반대로 상당부분 지지표를 증대시켜야 하며, 그 밖의 비영호남 지역에서도 호남출신 반대당 후보의 등장에 의해 지지표가 증대되어 나타나야 할 것이다. 예컨대 지지율변화를 단차원에 나타낸다면 왼쪽의 감소부분은 호남이, 오른쪽의 증가부분은 비영호남에서 영남지역으로 갈수록 증가분이 높게 나타나야 할 것이다. 김대중 후보 지지표의 지역별 변화는 그 역으로 나타나야 한다.
아래 그림은 6대 대선과 비교, 7대 대선에서 박정희, 김대중 후보의 득표비중의 변화를 지역별로 나타낸 것이다. 득표비중은 제1, 2당 후보의 합을 100으로 환산하여 나타낸 것이다. 이는 두 정당 후보의 전국적 득표율의 변화와 3당 이하 후보의 득표분포가 미치는 영향을 통제하면서 동시에 두 후보의 지지율 변화를 따로 살펴볼 필요를 없애기 위한 것이다. 이전 선거에 비해 두 후보의 전국 지지율 변화는 각각 +1.8, +4.4로 같은 방향으로 약간 상승했을 뿐이며 두 후보에 대한 지지율의 합계가 100%에 가까웠기 때문에 실제 득표율 변화와의 오차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아래 표에서 하단은 박정희 후보의 지지감소와 김대중 후보의 지지증대를 나타내며 상단은 그 반대이다.
<그림 1> 박정희, 김대중 후보의 지역별 득표비중 변화 : 6~7대 대선 (%)
위의 데이터는 앞서 7대 대선을 지역주의투표라고 가정했을 때 예상되는 변화와 거리가 멀다. 특징별로 살펴보자. 첫째, 영남권에서는 부산, 대구, 경남에서 박정희후보의 득표비중이 감소한 반면 이 지역에서 김대중 후보의 득표비중은 크게 증가되었다. 특히 부산의 경우 김대중 후보가 42.6%를 득표하였고, 이는 이전 선거에서 같은 당 후보(윤보선)가 얻은 득표율에 비해 11%가 증가한 것이다. 대구에서의 지지율 증대는 서울에서의 지지증가를 앞지르고 있다. 이는 박정희 후보의 지지증가가 영남에서 집중되어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경북의 경우 박정희 후보의 득표비중은 4.7% 증가되었지만 대구에서는 역으로 7.4% 감소되었다.
둘째, 호남의 경우 김대중후보에 대한 지지는 크게 증가되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호남의 투표성향의 변화는 7대 대선에서 새롭게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6대 대선에서부터 매우 뚜렷하게 나타난 현상이라는 점이다. 6대 대선에서 윤보선 후보와 박정희 후보의 호남지역 득표비중의 변화는 윤보선 후보가 5대 대선에 비해 전남에서 +13%, 전북에서 +8%(반대로 박정희 후보는 각각 -13%, -8)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규모는 7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의 득표비중 증대와 사실상 같은 크기이다. 따라서 호남의 투표결과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7대 대선이 아니라 6대 대선에서 호남의 투표결과가 보다 주목되어야 한다.
셋째, 그 밖의 비영호남 지역의 경우 서울과 제주를 제외하면 박정희 후보가 6대 선거에 비해 득표비중을 크게 증가시킨 것으로 나타났다. 흥미롭게도 이 규모는 영남에서의 지지증가보다 훨씬 앞지른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 결과는 지역주의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7대 대선경쟁을 지배하였던 안보이슈에 의해 보다 잘 설명된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어쨌든 영호남 지역의 표를 제외하고 나머지 지역만을 계산할 경우 17,175표 차이로 김대중 후보가 앞섰다는 사실에 보다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제 7대 대선에서 지역주의 이슈가 어느 정도 비중을 갖는 것이었는지를 살펴보자. 만약 7대 대선이 지역주의 이슈가 지배한 선거였다면 여야간 이슈제기의 빈도에서 지역주의 이슈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중앙일보를 소재로 이 시기 주제별 이슈점유도를 조사한 송근원(1994, 634)의 연구에 따르면 7대 대선에서 지역감정이 차지하는 이슈점유도는 0.9%로 이는 6대 선거에서 지역감정 이슈점유도 1.6%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실제로 전남일보, 대구매일, 경남일보 등 당시의 지방지를 통틀어 살펴보아도 7대 대선에서 지역주의 관련 단어가 기사본문에 포함되어 있는 기사의 수는 10개를 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 연구에서 지역주의 이슈가 매우 큰 비중을 갖는 것으로 해석되는 것은 다분히 결과론적인 해석이다.
7대 대선에서 가장 큰 이슈점유도와 이슈반응도를 갖는 이슈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예비군제 폐지 및 교련철폐’ 등을 둘러 싼 안보이슈이며, 다른 하나는 ‘삼선개헌/부정선거/부정부패’ 등 정치체제 정통성 관련 이슈이다. 각각의 이슈 점유도는 24.5%와 24.2%이다. 두 이슈가 지지표의 지리적 분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먼저 정치체제 정통성 관련 이슈는 높은 교육수준과 낮은 연령의 유권자가 집중되어 있는 도시지역에서 야당지지를 증대시킨다(윤천주 1981; 이갑윤 1998). 이에 대한 선거 연구자들 사이에 이견은 없다. 앞서 살펴본 서울, 대구, 부산의 대도시 지역에서 김대중 후보의 득표규모가 크게 증가했다는 것은 이를 뒷받침한다. 다음으로 안보 및 이념관련 이슈는 경기, 강원, 충청 지역에서 보수적 정향의 표를 집중시킨다는 연구가 있다(손호철 1992). 안보/이념관련 이슈의 효과는 4대 대선과 5대 대선 결과를 사례로 한 연구의 결론이다. 예컨대 5대 대선에서 18.3%의 이슈점유도를 갖는 박정희의 후보자격(사상시비) 관련 이슈가 제기되었을 때 박정희 후보의 전국 지지율과 지역지지율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그림 2> 5대 대선에서 박정희 후보의 전국 지지율과 지역 지지율의 차이
(서울, 제주 제외)
만약 5대 대선 결과가 지리적으로 ‘남북선거’의 양상으로 나타난 원인을 이념이슈에서 찾는 기존 연구의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7대 대선에서 경기, 강원, 충청권에서 김대중후보의 지지감소는 잘 설명된다. 두 선거 모두 이념적으로 좌경시비에 휘말린 후보에 대한 지지가 강원, 경기, 충청권에서 낮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물론 이념이슈와 지역별 유권자 투표성향을 분석한 연구가 매우 적은 상황에서 이러한 해석이 확증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초점은 1971년 선거를 지역주의 선거로 정의할 수 있는가에 있다. 따라서 앞서 살펴본 자료만으로도 이 선거를 지역주의 선거라고 해석하는 것이 사실과 크게 다르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공식적인 이슈차원에서 매우 작은 비중을 차지하는 지역주의 동원이 지방의 정치엘리트에 의해 비공식적으로 광범하게 진행되었다고 가정한다해도, 유권자가 투표결정의 차원에서 지역주의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1971년 선거과정에서 지역감정 관련 논의가 거의 발견되지 않는 반면 선거 후에는 선거결과를 지역감정에 의한 것으로 보는 주장들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1971년 선거에서 지역주의 문제는 실제 선거과정에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보다 오히려 선거결과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부각된 측면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선거 결과를 한국민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지역감정의 인자’ 때문으로 해석한 이영일(1971)의 주장을 참조할 수 있다. 선거 이후 정치적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권위주의 정권이 선거의 정치적 의미를 정치체제의 정통성과 관련된 문제로 해석되는 것을 피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거결과를 지역감정에 의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이들의 이해관계를 잘 뒷받침하는 것이다. 같은 시기였던 1971년 6월 19일 한국정치학회는 “선거와 정치발전”이란 주제로 1971년 선거 결과에 대한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에 참석한 경북대 김인곤교수는 선거결과만을 보고 지역감정이 작용했다고 해석하는 견해를 비판하면서 경상도 유권자의 투표결정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한국정치학회 1971, 220).
“저희들이 보기에서 選擧運動過程에서 聽衆들의 動向을 보면 湖南地方에서는 金大中氏를 위해서 婦女子들이 물을 떠놓고 七星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단다 하는 이야기까지 나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慶尙道 사람들은 그렇게 신경을 안씁니다. 全南에서 그렇게 하고 있으니 우리도 하자, 그런게 전혀 없었어요. 오히려 同情을 하고 그 후보가 훌륭하나 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고, 그래서 제가 보고 判斷한 바에 依하면 地域感情이 選擧結果에 作用했다 하는 것은 너무 結果만 보고 과장이 된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하면 慶尙道 사람들이 投票前에 무슨 約束을 한 事實이 없고 오히려 어떤 사람이 演說會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가 그곳 地方紙에 크게 비난을 받을 정도였다, 그래서 이 地域感情이 크게 作用했다고 너무 그렇게 몰아세우는 것은 非科學的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원문 그대로)”
사실 지역주의적 선거냐 아니냐의 문제를 접어두면 1971년 대선은 반권위주의적 대중동원의 특징을 갖는 것으로 보다 잘 설명된다. 앞 장에서 자세히 살펴보았듯이 1971년을 전후한 시기는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고조되고, 산업화와 경제성장의 비용을 감수했던 사회집단들의 저항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물론 1971년 선거에서 민주주의와 권위주의라는 정치적 가치를 둘러싼 갈등은 여전히 도시적 특성에 국한된 것이었다. 나아가 유권자의 절반이 농촌에 거주하고 일인당 GNP가 300달러도 되지 않는 조건에서 민주주의는 다수의 유권자에게 절실한 문제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미국과 일본시장에 가까운 지경학적인 조건에 의해 경제발전이 지리적으로 동남축에 집중되었을 때, 이 지역 유권자의 다수가 집권당 후보를 지지한 것은 지역주의의 개입을 가정하지 않고도 설명될 수 있는 결과이다. 설령 집권당 후보가 영남출신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경제개발의 혜택을 선호하여 집권당 후보를 지지하는 투표양상은 영남 지역 유권자에게 가장 영향력있는 투표결정의 동기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경제개발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1967년 대선에서 이미 매우 뚜렷한 특징으로 등장하였다. 6대 대선에서 경북의 집권당 후보 지지비중은 71%이며 경남은 75%, 부산은 67%였다. 역으로 1967년 반대당 후보(윤보선)가 경제개발의 지역적 혜택이 불균등하게 분배된 것을 이슈로 호남지역 유권자의 경제투표를 동원하고 유권자가 이를 수용한 것은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1971년 대선에서 호남출신 김대중 후보가 등장한 것은 이러한 투표경향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다. 따라서 1967년 대선을 기점으로 경제성장의 혜택을 지역적으로 분배하는 문제와 관련된 이슈가 영향력있는 이슈로 등장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지역주의 때문에 나타난 결과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
지역주의 문제와는 무관하게 1971년 대선에서 반대당의 정치동원 양상은, 한국정당정치의 역사적 전개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것은 집권당보다도 더 보수적이었던 야당이, 이 선거를 전후하여 권위주의에 대항하는 명실상부한 반대당으로 등장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정치적인 측면에 국한되지 않고, 경제적이고 이념적인 측면에서의 비판을 동반한 것이었다. 유권자 특히 도시의 유권자는 반대당의 이러한 이슈에 영향을 받았고 이는 영남지역에서도 매우 강한 영향을 미쳤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집권당이 반호남 지역주의를, 특히 영남지역에서, 동원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효과를 과장해서는 안 된다. 집합자료가 보여주는 것은 지역주의 동원이 영남지역, 특히 영남의 도시지역에서 반대당의 지지증가를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역주의 동원은 기존의 여권지지 유권자의 이탈을 막는 효과를 가졌을지 몰라도, 지역주의에 의해 유권자가 선호순서를 바꾸고 그 결과 투표결정의 방향을 반대당 후보에서 집권당 후보로, 혹은 집권당 후보에서 반대당 후보로 변경하였다는 기존 연구의 해석은 객관적 사실로 입증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회의원 총선 결과는 어떠했을까?
3. 국회의원 선거와 지역주의
앞서 살펴본 대로 기존 연구는 권위주의 시기 지역차별의 구조가 유권자 편성을 결정지었다고 설명한다. 그 특성은 “[수혜지역=여당후보=영남] 대 [피해지역=야당후보=호남]”의 형태를 갖는다(김만흠 1991, 111). 이러한 전제가 입증되려면 권위주의 통치기간 중 집권당의 지지기반은 영남에 의존을 많이 하게되고 반대로 호남의 경우는 김대중을 리더로 하는 반대당에 보다 지지를 많이 한 결과가 나타나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여야간 지지율 획득과 상실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여야 할 것이다. 아래의 그림은 지역차별이 구조화되었다고 가정되는 박정희 정권 이후 민주화 이전까지 영호남 지역에서 집권당과 반대당의 득표율 변화를 보여준다.
<그림 3> 민주화 이전 총선에서 영호남 지역별 여야간 지지율의 변화 : 1963-1985 (%)
지역주의적 가정이 예상하는 것과는 달리 영호남 모든 지역에서 집권당과 반대당의 지지율변화는 전체적으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호남에서 반대당의 지지보다 집권당의 지지가 전반적으로 높게 나타나고 있으며 반대로 경남의 경우는 8대 선거이후 여야간 득표율 격차는 11대를 제외하면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야 두 정당의 지역별 지지율을 전국 평균득표율과 대비해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기존 연구의 지역주의적 유권자 편성의 가정이 맞다면 영호남 두 지역에서 집권당과 반대당의 지지율은 전국평균을 크게 상회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아래 표는 여야간 지역별로 전국적 지지율과의 차이를 나타낸 것이다. 음의 정수로 나타난 것은 각 당이 전국 평균에 비해 낮은 득표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표 1> 민주화 이전 영호남의 투표성향
6대총선7대총선8대총선9대총선10대총선11대총선12대총선지역P1P2P1P2P1P2P1P2P1P2P1P2P1P2전북-0.31.84.9-2.9-2.65.4-9.2-4.7-2.3-1.82.40.61.6-2.8전남-1.20.3-0.2-4.34.2-2.68.7-9.72.6-8.7-4.60.50.5-3.9경북6.1-5.8-0.3-5.11.6-5.8-3.9-4.5-3.9-9.22.8-2.33.5-8.5경남6.90.20.03.9-1.61.81.95.6-1.2-0.1-3.1-1.6-1.10.8
* P1은 집권당, P2는 제1야당을 가리킨다.
위 표가 보여주듯이 영호남 어느 지역도 전국 평균과의 차이는 일관된 방향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 차이도 거의 무시할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영호남 지역에서 집권당과 반대당의 지지율 변화 추세를 살펴보아도 동일한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아래 그림은 영남지역에서 집권당 지지율변화와 호남지역에서 반대당 지지율변화의 다항식 추세선을 나타낸다.
<그림 4> 영호남 여야 지지율 변화 추세 : 6대-12대 총선
위 그림이 보여주듯이 영남지역에서 집권당 지지기반 강화경향, 반대로 호남에서 반대당 지지기반 강화경향은 나타나지 않는다. 실제 결과는 오히려 그 역의 경향이다. 영남에서 집권당은 지지기반의 약화경향을 보여주며 반대로 호남에서 반대당의 지지약화경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요컨대 ‘권위주의 지역지배체제의 영남지지기반화 경향’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아마도 선거에서 나타난 경향으로만 본다면, 주목할 것은 민주화라는 정치적 가치에 대한 투표자들의 선호가 보다 분명해졌다는 사실이다. 1985년 12대 총선 결과는 이를 잘 보여준다. 이 선거의 가장 큰 특징은 도시 지역과 젊은 세대에서의 강한 야당 지지성향과 전체적으로 높은 투표율에 있다. 6대 총선에서 11대 총선 사이 평균 투표율은 74.6%였던 반면 1985년 12대 총선의 투표율은 84.6%였다. 투표율과 도시 지역에서의 야당 지지율이 높아진 것은 이 선거가 민주화를 목표로 내건 대규모 대중동원을 동반했기 때문이다. 야당 진영에서는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타협파의 입지가 급격히 축소되었고 반권위주의 선명성을 내건 투쟁파가 주도권을 장악했고 학생운동 역시 대대적으로 활성화된 것도 이때였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1987년 6월 항쟁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굳이 민주화 이전 선거에서 나타난 경향성을 말하라면 그것은 지역기반 강화 현상이 아니라 민주화에 대한 강한 선호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4. 민주화 이행기의 전력상황과 지역주의 문제
민주화 직후 치러진 1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어땠을까? 1987년 12월의 민주화 정초선거의 전략상황에 대한 기존 연구는 서로 다른 관점에서 경쟁적 설명모델을 발전시켰다. 첫 번째 설명모델은 강한 사회 균열로서 지역주의의 존재에 초점을 둔다. 이들에 따르면 지역균열은 “권위주의적 지역지배체제”에 의해 형성된 한국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체제와 구조를 특징짓는 중심 균열이다. 그 결과 정초선거에서 유권자는 지역균열과 지역주의에 의해 행위선택을 하였고 그 결과가 지역정당체제의 등장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 모델은 지역적 차이에 따른 강력한 사회갈등과 그것의 의식적인 형태로서 지역주의에 의한 유권자 편성에 초점을 둔다는 점에서 ‘사회균열모델’로 정의할 수 있겠다.
두 번째 설명모델은 정당의 지역주의 동원에 초점을 둔다. 앞서의 사회균열모델의 경우 정당과 정치엘리트를 독자적 행위주체로 가정하지 않는다. 유권자와 마찬가지로 정당과 정치엘리트의 행위결정 역시 지역균열에 의해 규정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정당의 지역주의 동원에 초점을 두는 설명모델은, 정당과 정치엘리트가 사회균열로 환원하여 설명할 수 없는 독자적 이해와 전략적 목적을 갖는다는 행위가정을 통해 유권자의 지역주의적 투표결정을 설명한다는 점에서 다른 인과논리를 갖는다. 그 핵심은 “국민들이 지역주의적 투표성향을 보이기 이전에 지역정당이 시간적으로 선행하여 존재(문용직 1992, 7)”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유권자의 지역주의적 투표결정은 지역정당간 “지역주의적 대립이 첨예화”된 결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유권자의 지역주의적 투표결정을 지역주의를 동원한 정당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동원모델’로 정의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 두 모델은 매우 다른 퍼스펙티브에 기초를 두고 있다. 또한 경험적인 측면에서도 반대당의 두 후보(김영삼, 김대중 후보)의 분열에 대해 상이한 해석을 갖는다. 전자의 사회균열모델의 경우 양김의 분열은 지역균열의 구조적 결과로 설명된다.
지역균열의 구조가 정치엘리트 내지 정치의 영역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대중의 수준에서도 광범하게 존재하고 있음(으로) ....... 정치엘리트의 분열이 지역균열을 구체화시키고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지만 이미 존재하는 사회적 지역균열이 정치엘리트 분열의 한 원인이 되었다(김만흠 1991, 7).
반면 후자의 동원모델에서 양김의 분열은 정당의 조직적 성격과 정치엘리트의 전략적 이해에 의해 설명된다. 한국의 정당조직은 지역파벌 혹은 지역파벌 간의 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록 강력한 권위주의 집권당에 대항하기 위해 여러 지역파벌이 하나의 반대당으로 통합된다해도 그것은 사실상 하나의 정당 안에 복수의 정당이 병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역파벌간 연합의 필요성이 사라질 경우 그것은 곧 독자적 정당대안을 조직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1987년 6.29선언은 지역파벌 간 연합의 필요성을 사라지게 했으며 그 결과 반대당은 두 개의 지역정당으로 나타났다.
야당의 조직적 측면에서 볼 때 분당은 1987년 6.29때 예고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또한 분당과 동시에 호남과 영남은, 야권의 경우, 필연적으로 대결케 되어 있었다(문용직 1992, 16).
그러나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두 모델은 1987년 정초선거에서 야당의 분열과 지역주의적 투표결정을 필연적인 결과로 해석하는 점에서 공통적인 해석을 갖는다. 전자의 사회균열모델의 경우, 1987년 정초선거는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 의해 억압되었던 지역주의가 표출된 선거로 해석된다. 지역주의는 이미 민주화 이전시기부터 중심적인 사회균열이었으며 민주화로 인해 지역균열의 표출을 제약하는 정치적 장애물이 약화된 것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이 시기 전략상황은 지역주의 단일균열의 이슈상황으로 정의되고 유권자는 지역주의 단일이슈에 의해 쟁점위치를 설정하였다고 본다. 그 결과 13대 대선의 “지역주의적 정치행태와 이에 따른 지역균열의 정치구조는 예견된 것”(김만흠 1991, 116)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동원모델 역시 인과논리는 다르지만 13대 대선을 지역주의 단일쟁점 상황으로 정의한다. 그 근거는 두 가지이다. 첫째, 1987년 6월항쟁과 6.29로 인해 대다수 유권자가 원했던 절차적 민주주의가 실현되었기 때문에 민주 대 독재의 균열이 유권자의 투표결정에 미치는 영향은 사라졌고 따라서 지역주의만이 유권자가 쟁점위치를 설정할 수 있는 유일한 이슈가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6월항쟁에서 유권자가 원했던 것은 대통령 직선제라는 민주주의의 절차적 내용이었고 그 이상은 아니었기 때문에 대통령직선제의 수용은 민주화 쟁점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둘째, 정당의 지역주의 동원은 집권당 뿐 아니라 반대당을 포함하는 모든 정당의 지배적 전략이었다는 것이다. 집권당은 강력한 두 반대당의 표가 지역적으로 분열되기를 선호하기 때문에 지역주의를 동원하였다. 두 반대당 후보(김대중, 김영삼)는 각자 자신의 지역에서 지역주의를 동원하고 다른 후보의 경우 지역주의를 동원하지 않는 것에서 최대의 보상가(pay-off)를 갖는다. 따라서 전략상황은 죄수의 딜레머 게임으로 나타나고 결과적으로 두 후보 모두 각각의 지역에서 지역주의를 동원하게 된다.
상대방이 어떠한 전략을 택하던지 간에 자신은 지역주의에 호소하는 것이 최선의 전략임을 알 수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지역주의에 호소하는 것은 호소하지 않는 것보다 유리했던 것이다(문용직 1992, 10).
이상과 같은 주장대로 만약 13대 대선에서 유권자가 직면한 전략상황이 지역주의 단일쟁점의 상황이었고, 정당들이 경쟁적으로 지역주의를 동원했다면, 지역주의적 투표결정과 지역정당체제의 등장은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과연 그러한가? 이 문제를 검토하기 위해 관련된 가정을 세분화하여 살펴보자. 먼저 유권자와 관련된 가정은 다음의 세 가지 문제제기를 통해 검토한다. 첫째는 1987년 정초선거의 상황에서 유권자는 지역균열을 지배적인 균열로 인식하였는가 하는 문제이다. 둘째는 지역주의, 지역편견, 유권자의 투표결정 사이의 인과관계는 성립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셋째는 직선제 수용으로 인해 유권자는 민주화 이슈에 대해 더 이상 반응하지 않았는가의 문제이다. 정당과 관련된 가정 역시 세 가지 문제제기를 통해 검토한다. 첫째, 한국의 정당을 지역파벌 혹은 지역정당으로 정의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둘째, 반대당 두 후보의 분열은 지역주의에 의한 결과였는가의 문제이다. 셋째, 지역주의 동원은 모든 정당의 지배적 전략이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5. 사회적 균열구조와 지역주의 문제
우선 한국사회 균열구조와 관련된 문제를 보자. 기존 연구가 제시하는 증거들은 생산적 자원의 분배가 지역적으로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왔다는 사실과 생활세계에서 특정 지역에 대한 편견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곧 지역균열의 지배적 우위성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앞서도 지적했듯 비교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다. 생산적인 자원의 배분에 영향을 미치는 집단적 요인은 지역만이 아니다. 여기에는 직업, 소득, 교육, 성(性), 이념 등의 변인도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이들 요인을 분획선으로 자원의 불평등한 분배구조를 보여주는 것은 어렵지 않으며 그것은 지역보다 훨씬 불평등한 결과를 나타내는 요인들이다. 앞서도 지적했듯이 편견 역시 지역에만 부과되는 것은 아니다.
지역균열과 관련하여 기존 연구가 제시하는 증거들은 생산적 자원의 분배가 지역적으로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왔다는 사실과 생활세계에서 특정 지역에 대한 편견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역균열의 존재를 보여주는 것일지는 몰라도, 지역균열의 지배적 우위성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앞서도 지적했듯이 비교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다. 생산적인 자원의 배분에 영향을 미치는 집단적 요인은 지역만이 아니다. 여기에는 직업, 소득, 교육, 성(性), 이념 등의 변인도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이들 요인을 분획선으로 자원의 불평등한 분배구조를 보여주는 것은 어렵지 않으며 그것은 지역보다 훨씬 불평등한 결과를 나타내는 요인들이다. 앞서도 지적했듯이 편견 역시 지역에만 부과되는 것은 아니다.
1988년 12월에 조사된 한국사회학회와 중앙일보의 “한국사회의 갈등인식”에 관한 공동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사회를 분열시키는 가장 큰 갈등은 5가지로 나타났다. 지역갈등은 계층갈등(89.3%), 노사갈등(89%)에 이어 85.3%로 세 번째였다. 그밖에도 세대갈등(82.3%)과 이념갈등(67.3%) 역시 높다고 응답했다. 이는 절대다수의 사회구성원이 민주화 이후의 한국사회를 대단히 갈등적인 사회로 평가했음을 보여준다. 1987년 7～9월의 대규모 노동조합운동의 등장을 고려하면 계층갈등이나 노사갈등의 존재에 대한 피조사자의 높은 인지도는 현실적이다. 반면 1988년이라는 위 자료의 조사시점을 고려하면, 그 이전에도 이전에도 지역균열이 높게 인지되었는지 아니면 1987년과 1988년의 선거결과 때문에 나타난 변화인지 하는 인과의 방향을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1986년 12월말과 1987년 12월말에 각각 조사된 한국일보의 여론조사결과는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보여준다. 동일한 조사항목 중 ‘지역감정 및 지역갈등의 정도’에 대한 질문에 대한 응답을 살펴보면, 민주화 이전 지역감정이 심각하다고 응답한 비율(56.7%)과 그렇지 않다고 응답한 비율(43.4%)이 큰 차이가 없는 반면, 1987년 대통령 직접선거 이후 조사에서는 심각하다고 응답한 비율(77.3%)이 그렇지 않다는 응답(22.7%)을 압도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1987년 10월 20일을 전후해 조사된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의 여론조사(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원 1987)도 유사한 결과를 보여준다. ‘한국사회 당면과제’에 대한 16개 항목 중 ‘지역감정 해소’에 대한 응답은 8위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난 반면 ‘노사문제’, ‘농민문제’ 등 계층균열에 대한 응답율은 2-3위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 조사된 한국갤럽조사연구소의 여론조사 역시 같은 결과를 보여준다. 차기 대통령이 처리해야 할 중요과제 세 가지를 묻는 질문에서 ‘지역감정해소’는 응답율 8%에 전체 15위로 나타났다. 이 결과는 유권자가 11위로 나타난 외교문제나 12위로 나타난 세금문제보다 지역감정문제를 덜 중요한 것으로 평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수위를 차지한 응답은, 계층적인 이슈와 관련된 경제문제(1위), 농어촌문제(2위), 빈부격차문제(3위), 사회복지문제(9위) 등과 정치사회적 이슈와 관련된 기본권신장문제(4위), 부조리척결문제(5위), 언론자유(6위), 통일문제(7위), 교육문제(10위) 등이다(조선일보, 1987년 11월 15일자). 어떤 자료도 민주적 개방이후 정초선거에 이르는 시기 한국사회가 지역균열에 의해 압도되었음을 보여주지 않는다.
반호남지역주의의 피해자로서 어느 지역민보다 지역균열에 민감했다고 볼 수 있는 호남출신의 인식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김만흠(1987)의 조사결과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사회경험에서 출신지역으로 인한 피해경험”에 대한 질문에서 전라도 출신의 응답 중 도움이 되었거나 영향이 없었다는 비율이 83.2%에 이른다거나, “출신지역 밝히기를 꺼리거나 숨긴 경험”에 대한 질문에서 전라도 출신의 응답 중 그런 적이 없다는 비율이 83.6%로 나타난다. 이는 한국의 지역문제가 특정 지역을 사회적으로 통합되지 못하게 할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으며, 민주화의 진전을 통해 지역주의의 물적 토대라고 할 수 있는 정치의 권위주의, 시민사회의 보수성이 보편주의적 원리에 의해 개혁되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라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출신지역이 장애가 된 적이 있다’는 응답에 있어서나, ‘출신지역을 감춘 적이 있다’는 응답에 있어서 전라지역 출신의 응답(각각 16.7%, 16.4%)이 다른 지역출신에 비해 높은 것은 사실이며, 비록 그 비율은 크지 않다 하더라도 특정 지역에 대한 차별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학문적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지역편견이 사실 이상으로 과장되거나 혹은 지역문제의 본질을 일반시민으로서 유권자가 갖는 지역주의로 환원하는 접근은 경험적으로나 규범적으로 문제의 핵심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한 과장에 바탕하여 이론적으로 한국의 지역문제를 분절사회의 지역문제와 동일시하거나 전통사회적 요소의 연장으로 해석하고, 권력구조를 바꾸어서라도 해결되어야 할 문제로 주장되는 것은 ‘이론적 지역주의’ 혹은 ‘지역근본주의’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홉스봄(E. Hobsbawm 1990)은 “민족주의를 연구하는 사람이 민족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경구적 지적을 한 바 있다. 그리고 이 지적은 지역문제를 다루는 연구자에게 있어서도 동일하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음 문제를 살펴보자. 권위주의 정권이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한 것은 유권자의 투표결정에 대한 민주화 이슈의 영향력을 소멸시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나? 집단적 민주화투쟁에 직면해 권위주의 국가가 대통령직선제를 수용했을 때, 이것으로 민주화에 대한 의제는 종식되었다고 판단한 유권자는 있을 수 있다. 이들 유권자의 경우 6월항쟁에 대한 지지는 권위주의 일반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인권침해와 살인행위로 나타난 경성권위주의에 대한 반대의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권위주의 국가의 민주화 조치에 만족한 이들 유권자에게 집권당 후보는 더 이상 선택의 대상에서 배제된 대안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유권자는 6월항쟁의 이슈설정자가 아니었으며, 이들 유권자의 규모 역시 과장될 수 없다. 적어도 대통령 직선제 수용을 강제했다는 의미에서 한국현대정치사에서 가장 강력한 ‘민주화 이슈혁명’을 이끌었던 6월항쟁의 주축행위자(pivotal players)의 선호는 위의 행위자와는 성격을 달리한다. 그들에게 대통령직선제라는 요구는 정권교체 혹은 한국사회의 구조적 변혁, 아니면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엘리트의 집권이라는 목표를 실현하는 수단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이들의 선호강도는 강하고, 대선에서 이를 실현할 수 있다는 기대의식은 강렬했다.
13대 대선은 유세의 규모와 열기, 사회단체들의 자발적 선거감시운동의 조직 등 모든 측면에서 역대 어느 선거와도 비교될 수 없는 사례이다. 이는 또한 투표율로도 증명될 수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13대 대선의 전략상황을 대다수 유권자가 직선제 수용에 만족함으로써 민주화 이슈가 소멸된 상황으로 정의하고, 다른 사회균열이나 이슈가 없었음으로 유권자는 지역이라는 일차적 유대감에 의해 투표결정을 하였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투표행위가 갖는 기대효용은 낮게 되고 그 결과 투표불참을 선택한 유권자의 규모는 증가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지역연고 후보를 갖지 못한 서울, 경기, 강원, 제주 등의 투표율과 민주화와 정권교체에 강한 선호를 갖는 2-30대 유권자의 투표불참율은 더욱 높게 나타나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 결과는 이러한 가정과는 다른 것이었다. 우선 13대 대선의 투표율은 대단히 높았다. 89.2%라는 투표율은 1960년대 이후 선거 중 가장 높은 수치이다. 뿐만 아니다. 이 투표율은 그 구성에 있어서 연령별, 도농별, 성별 차이를 동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1960년대 이후 선거사에서 유일한 사례이다. 서울, 경기, 인천, 강원, 제주를 모집단으로 한 투표율(88.7%)은 전국 평균과 사실상 차이가 없으며 오히려 부산의 투표율(88.4%), 충남의 투표율(88.3%)을 앞선다. 어떤 측면에서 보든 13대 대선의 투표율은 정권교체와 권위주의 정권유지를 둘러 싼 강렬한 경쟁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6. 정치 동원과 지역주의 문제
이제 정당의 지역주의 동원과 관련된 문제를 살펴보자. 정당과 관련된 행위가정에 있어, 정당을 지역균열을 반영하는 종속적 변인으로 가정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파네비안코(Panebianco 1988)가 강조하듯 정당은 사회균열을 대변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자체의 목적에 따라 수단을 선택하는 조직이다. 따라서 조직의 성격에 따라 사회균열의 제약을 크게 받는 정당과 그렇지 않은 정당이 존재하고, 분석의 초점은 이곳에 맞춰져야 한다. 예컨대 정당리더의 결정력이 강한 경우와 반대로 사회균열에 따른 이해집단(예컨대 노동조합)이 정당의 결정구조에 미치는 영향력이 강한 경우 정당의 전략적 선택의 자율적 범위는 큰 차이가 있다. 마찬가지로 정당내부의 조직적 차원에서도 정당리더와 활동가, 당원, 지지자 각각의 영향력이 정당의 결정구조에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가 중요하다. 정당리더가 결정권을 독점할 경우 결정집단의 크기는 1에 가까워진다. 반면 평당원의 영향력이 결정과정에서 발휘된다면 결정집단의 크기는 극대화된다. 한국의 정당이 사회균열에 따른 정당의 정책 결정에 구속될 만큼 사회집단과의 결속이 강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정당조직 내부에서 볼 때도 활동가, 당원, 지지자가 정당의 결정과정에서 갖는 영향력은 사실상 무시될 수 있다. 따라서 정당을 사회균열 혹은 유권자 편성구조를 반영하는 잔여범주로 가정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또한 사회균열로서 지역균열이 갖는 순효과(net effect)는, 유권자가 직면한 정당대안의 구조와 경쟁하는 정당들의 동원전략의 효과에 대한 분석이 전제되지 않는 한 분리할 수 없는 변인이기도 하다. 따라서 정당과 정치엘리트가 실제로 지역주의를 동원했는지의 문제와 상관없이, ‘정치에서 조직이란 편견을 동원하는 존재’, ‘자신에 유리하게 균열과 갈등을 동원하고 활용하는 존재’라는 이들에 대한 행위가정(Schattschneider 1960, 30-4) 없이는, 민주화 이후 한국의 정치변화를 설명할 수 없다.
정당과 관련된 첫 번째 문제는 한국정당의 조직적 성격을 정의하는 문제이다. 한국의 정당조직이 공식적인 결정구조를 초월하는 파벌적 구조를 갖는다는 사실은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러한 파벌의 구성원이 지연이나 학연과 같이 일차적인 유대와 강한 상관관계를 갖는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는 한국에서 정치를 직업으로 하는 정치엘리트의 충원과 재생산이 사회적 갈등이나 요구와 유리된 채 하나의 정치계급으로 기능하게 된 기초이다. 그리고 이는 한국정당조직의 전근대성 혹은 사회적 무책임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들 파벌조직을 지역파벌 혹은 지역정당으로 정의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한국의 경우 역대 어느 파벌도 지리적으로 구분되는 경제적 부문이해를 대변하는 섹션의 성격을 갖지 않았다. 다시 말해 이들 파벌이 정당 내에서 혹은 하나의 정당으로서 지역의 동질적 이해를 대표하는 기능적 역할을 한 것은 아니다. 파벌의 구성원이 같은 지역출신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인과적으로 엄밀하게 말해 그들의 출신지역이 같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이들 파벌이 사회적으로 특정 집단의 이해에 기반을 두지 않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이다. 한국정당에서 파벌의 분류와 성격은 지역이 아니라 그 리더에 의해 규정된다. 파벌이 리더를 중심으로 수직적 결정구조를 갖게 될 때, 그 구성원의 충원과 재생산이 리더가 갖는 일차적 특징과의 거리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실제로 한국 정당의 역사에서 파벌은 지역파벌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역으로 파벌의 리더들이 자신의 조직적 영향력을 경쟁적으로 확대하는 과정을 통해서 동질적인 출신지역의 구성을 갖는 것으로 발전해왔다.
마찬가지로 1987년 반대당의 두 파벌(상도동계와 동교동계)이 독자적 정당으로 분열된 것은 이들이 지역파벌이기 때문에 나타난 필연적 결과가 아니다. 당시 두 파벌의 갈등과 분열은 두 가지 문제와 관련된 것이다. 하나는 정당의 결정구조이다. 다른 하나는 후보조정게임이다. 조직으로서의 정당이 구성원의 행위를 구속할 수 있는 공식적인 결정구조를 갖지 못할 때 집합적 결과의 합리성은 보장되지 않는다. 1987년 반대당이 후보문제에 있어 조정의 실패를 낳은 제도적 요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전당대회든 당무회의든 당의 공식적 결정구조가 작동하지 않았을 때 결과는 이를 초월하는 두 정치엘리트간의 흥정게임으로 나타났다. 흥정게임의 균형은 두 이해당사자의 이해를 분점하는 데 있다. 실제로 두 파벌 지도자간의 흥정게임은 당권과 후보를 분담하는 문제 혹은 후보의 순위문제, 즉 누가 먼저 후보가 되고 다른 사람이 다음 번 대선의 후보가 되는가의 문제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 문제 역시 흥정의 균형을 이끌어내는 제도적 행위 구속의 문제로 나타난다. 당권을 갖고 다음 번 대선후보가 되는 사람 N(next)의 기대가치 E(N)은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E(N) = r(pC + (1-p)L)
C는 다음번 대선후보가 되었을 때 얻게 되는 가치이며, p는 다음 번 대선에서 약속대로 후보가 될 확률이다. L은 이번 선거에서 후보가 되지 못하는 경우 얻게 되는 기대가치이다. 이 기대가치는 두 흥정당사자가 약속한 당권장악을 핵심으로 하지만 후보를 양보함으로써 유권자로부터 얻게 되는 도덕적 신뢰가 포함될 수도 있다. r은 시간할인율이다. 후보를 양보함으로써 얻게 되는 기대가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낮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후보조정의 성공에 있어서 핵심은 시간할인율과 약속대로 다음 번 대선후보가 될 수 있는 확률이다. 만약 할인율이 작거나 다음 번 대선에서 후보가 될 수 있는 확률이 높고, 반대로 두 후보로 분열될 경우 당선가능성이 낮다고 평가되었다면, 대권 후보를 양보하는 선택의 기대가치는 서로 분열되어 대선에 출마하는 경우의 기대가치보다 높다고 평가할 것이다. 그러나 이를 보장할 제도적 구속은 약했다. 한국의 권력구조에서 대통령이 갖는 막강한 영향력은 정계개편이든 아니면 다른 수단에 의해서든 흥정의 균형을 파기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각 흥정대상자가 계산하는 시간할인율은 대단히 높으며 약속이 지켜질 확률은 대단히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두 흥정당사자 모두, 다음 번 후보가 되는 선택의 할인된 기대가치를 독자적으로 출마하여 얻는 기대가치보다 낮게 평가했다면 흥정은 파기된다. 1987년 반대당의 분열은 정확히 이러한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지역파벌의 조직적 특성이 낳은 필연적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이번 선거에서 단일후보가 되지 못할 바에는 독자 출마하는 것이 낫다고 평가한 두 파벌지도자의 전략적 이해와 그것이 조정실패로 귀결되는데 영향을 미친 한국정당조직의 비민주성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제 가장 중요한 문제를 살펴보자. 원인이야 어찌되었든 반대당의 후보조정이 실패한 결과 분열되어 나타난 두 당이 출신 지역에 있어서 특정 지역에 편중된 정치엘리트들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그리고 이는 두 당이 서로의 연고지역에서 지역주의의 동원을 전략적 선택의 대상 중의 하나로 설정할 수 있는 전략적 근거를 갖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문제는 실제로 지역주의를 동원했는가, 그리고 이러한 선택이 모든 정당의 지배적 전략이었는가 하는 데 있다. 집권당의 경우 지역주의 동원은 전략적 이해를 갖고 또 실제로 동원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특히 민주화와 정권교체를 선호하는 유권자가 다수를 차지하는 조건에서, 이들 유권자 집단을 두 반대당 후보에 대한 지지로 양분시키는 것은 가장 중요한 전략적 목표였다. 지역주의의 동원은 이를 위한 효과적인 수단으로 선택되었다. 그러면서도 지역이라는 변수와 무관하게 현상유지를 강하게 선호하는 보수적 유권자 집단의 지지를 독점할 가능성이 높음으로, 집권당 후보에게 지역주의 동원이 가져올 대차손(trade-off)은 크지 않다. 또한 송근원(1994, 151-2)의 연구가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듯이, 집권당의 지역주의 관련 이슈의 내용구성은 ‘안정이슈’와 연결된 것이었다. 집권당이 동원했던 지역주의는 특정 후보가 집권할 경우, ‘유세장 폭력’에서 볼 수 있는, 특정 지역의 보복적 행위가 만연될 것이라는 내용구성을 갖는 것이었다.
반면 나머지 세 반대당 후보의 경우 지역주의 동원은 지배적 전략이 될 수 없었다. 우선 지역주의의 동원은 선거경쟁에서의 승리와 집권을 목적으로 하는 정당의 이해관계와 양립하기 어렵다(Schattschneider 1942, 112). 예컨대 대선에서 승리를 원하는 후보가 지역주의를 동원하는 것은 자신의 지역기반에서는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데 기여하겠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그 역의 결과를 낳을 것이다. 더욱이 대통령선거가 승자독점의 양극화된 경쟁을 유인하는 제도적 효과를 갖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역기반만으로 승자가 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지역 유권자의 규모가 작은 정당의 경우는 특히 그러하다. 민주화 이후 세번의 대선에서 승자가 획득한 지지율의 평균은 40%이다. 13대 대선의 네 후보를 준거로 할 때 네 개의 광역지역(경북, 경남, 호남, 충청) 중에서 이를 상회하는 유권자 규모를 갖는 지역은 없으며, 이중 두 광역지역의 유권자수를 합해도 이에 도달하지 못한다. 따라서 자신의 지역기반에서 100%의 지지를 획득한다고 해도 자신의 지역기반을 상회하는 규모의 지지를 다른 지역으로부터 얻어야만 승자가 될 수 있다.
기존 연구가 간과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지역주의가 갖는 성격 혹은 효과에 대한 것이다. 한국의 지역주의가 갖는 핵심적 성격은 후보와 해당 지역유권자가 동일한 지역연고를 갖는다는 사실에 기인한 ‘긍정적(positive) 지역정체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지역주의의 핵심은 특정 지역 혹은 특정 지역출신 후보에 대한 ‘배타적(negative)’ 의식으로 나타나고 그 기초에는 급진적 변화가 가져올 미래소득의 하락을 회피하려는 동기가 있다. 따라서 지역주의는 반대당의 세 후보 중 하나를 지지할 가능성이 높은 유권자를 집권당으로 향하게 하는 효과를 갖는다. 김대중 후보의 경우 지역주의는 호남 이외의 지지시장을 확대하는 데 부정적인 효과를 갖는다. 비호남 유권자가 지역주의에 의해 영향을 받을수록 그 피해자는 김영삼과 김종필 후보가 된다. 이들 후보를 지지할 가능성이 높은 유권자가 지역주의에 영향을 받을 경우,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회피하기 위해 집권당 후보를 지지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13대 대선 과정에서 반대당의 세 후보가 집권당의 지역주의 이슈를 회피하고자 했던 전략적 근거이다.
11월 초 김대중의 부산집회가 괴청년들의 반대시위에 부딪히고 김영삼의 광주유세가 무산된 직후 두 후보 진영 사이의 논란이 있었지만, 곧바로 두 후보 진영은 집권당의 지역감정동원에 대한 공동 대처에 합의하였다. 이후 두 후보 진영의 일관된 태도는 반지역주의였다. ‘유세장 폭력사태’는 “정보기관의 공작(김대중)” 혹은 “민정당정부가 고의적으로 만들어낸 조작행위(김영삼)”이며 “지역감정에 좌우되는 것은 노태우 후보를 도와주는 것”이라는 입장을 발표하였다. 상대 후보가 자신의 지역기반에서 유세를 할 경우 두 당은 지구당을 통해 유세방해 행위가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할 것을 지시하였다.
김종필 후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그의 정치적 기반이 충청에 국한되어 있다고 판단했다면 지역주의 동원은 합리적 수단이 된다. 그러나 그는 지역주의를 동원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 13대 대선에서 그의 전략적 목표는 당선이 아니라 정치시장에의 진입 혹은 잔류였다. 그리고 이 목표는 13대 대선이 아니라 뒤이은 총선에 전략적 초점을 두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의 정치적 목표는 대선에서가 아니라 총선에서 표와 의석을 극대화하는 데 있었다. 둘째는 지리적으로 그의 지지기반은 충청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경기, 강원, 경북을 포괄하는 것이었다. 6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이는 13대 총선 결과를 통해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그가 지역주의를 동원했다면 당장 대선에서는 충청권에서 보다 많은 표를 획득할 가능성은 있어도 전략의 초점인 총선에서는 충청 이외 지역의 잠재적 지지시장을 상실할 가능성이 높았다. 셋째는 반급진주의와 결합되어 있는 지역주의의 개입은 그의 지지기반인 보수층과 고연령의 유권자로 하여금 집권당을 지지하게 만드는 효과를 갖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13대 대선에서 그는 지역주의 동원을 선택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가 선택한 것은 보수세력의 장기적 이익을 대변하겠다는 이슈전략이었다. 13대 대선에서 그가 직면한 최대의 어려움은 당선가능성이 사실상 없다는 것이 낳는 유권자의 전략투표였다. 따라서 그가 잠재적 지지 유권자의 장기적 이해에 호소함으로써 당선가능성에 의한 할인율을 낮추고, 행정부를 이끈 경험을 갖는 정당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강조함으로써 기대가치를 증가시키는 데 전략의 초점을 두었다.
물론 지역기반이 서로 다른 각 후보가 자신의 지역기반에서 지지표를 보다 증대시키면서 동시에 다른 정당 후보의 영향력이 침투하는 것을 통제하기 위해, 각자의 지역에서만 지역주의를 동원하는 것은 개별 정당의 합리적 전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정보의 통제를 전제로 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지역에서 지역주의적 동원이 다른 지역의 유권자에게 전달되지 않아야 한다. 만약에 정당의 이슈전략이 유세와 같은 공개적 채널에 의존한다면 이는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른 데 있다. 그것은 설령 지역주의가 자신의 연고지역에서 표를 극대화하는 데 효과를 갖는다 해도, 지역주의 그 자체가 갖는 효과에 의해 모든 정당들이 경쟁적으로 동원할 이유가 없다는 데 있다. 그것은 어느 한 정당이 특정 지역을 대상으로 지역주의를 동원한다면 다른 지역 유권자 역시 반사적으로 영향을 받는 일종의 ‘거울효과’를 갖기 때문이다. 기대가치의 극대화를 목표로 하는 합리적 행위자의 전략적 초점은 한계가치(marginal value)에 있다(Mankiw 1997). 마찬가지로 지지표의 극대화를 목표로 하는 정당의 전략적 선택 역시 부가적 지지시장이다. 그리고 그 영역은 자신의 지역기반 밖에 존재하는 타지역 유권자이다. 한 정당이 지역주의를 동원하고자 하는 한 다른 정당들 역시 각자의 지역기반은 공고화된다. 따라서 이미 한계가치가 0에 가까울 만큼 응집된 지역기반을 향해 지역주의를 동원한다면, 다른 지역에 지지를 부가적으로 늘릴 수 있는 가능성은 줄어든다. 집권당의 지역주의 동원전략이 등장한 이후 김대중 후보의 경우 호남지역에서 대규모 유세를 피하고자 했다. 김종필은 대규모 대중유세는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집권당의 지역주의 동원 이후 유일하게 자신의 지역기반에서의 대규모 유세를 동원한 것은 김영삼 후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지역주의 동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역으로 지역주의가 부산‧경남 유권자에게 미치는 부정적 효과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음 장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부산‧경남에서 집권당이 동원한 지역주의의 영향력이 크면 클수록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회피하고자 유권자가 집권당 후보를 지지하는 경향은 증대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집권당 후보를 제외한 정당후보들은 지역주의를 동원하지 않았다. 실제로 13대 대선의 과정에서 정당과 후보가 제시한 지역주의 관련 이슈빈도가 전체 이슈점유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작다. 13대 대선에서 이슈별 빈도와 반응도를 조사한 송근원(1994, 157)은, 이 시기 지역감정 이슈가 빈도와 반응도 양 측면 모두에서 “예상과는 달리” 독립된 이슈항목으로 취급할 수 없을 만큼 작은 정도로 나타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갑윤(1998) 역시 당시 야당후보가 실제로 지역주의를 동원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 대신 그가 주목하는 것은 지방의 정치엘리트이다. 이들은 대선 이후 이 지역에서 총선 후보로 출마할 것이며, 이 경우 자신들의 지역구가 자신의 소속정당에 강한 지지를 갖게 되는 것은 이들의 이해와 부합한다. 그리고 이러한 가정을 확대한다면 비록 지역주의가 공식적 동원이슈가 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당조직을 활용한 비공식적 동원의 가능성, 혹은 국가기구를 동원한 공작적 차원의 동원의 가능성을 포함할 수도 있다. 지역의 정치엘리트나 당조직을 통한 통제된 지역주의 동원의 가능성은 비록 경험적 증거는 없지만 설득력있는 가정이다. 그리고 공작적 차원의 지역주의 동원은 13대 대선에서 실제로 나타난 현상이기도 하다.
물론 ‘공작’이나 ‘비공식적 동원’이라는 요인 역시 지역정당체제의 등장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우선 13대 대선의 투표결과를 공작적 차원의 지역주의 동원의 결과로 설명한다면 이는 유권자의 비합리적 투표결정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것은 유권자가 비이성적 지역편견과 조작된 정보를 수용한 반면, “정보기관의 음모와 공작”이라는 반대당 후보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이 제시한 정보, 지역감정에 의해 투표결정을 하지 말자는 이들의 주장을 거부한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분명 공작적 차원의 지역주의 동원이 가져온 파장은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이러한 요인이 지역주의의 동원을 가정하지 않았을 경우에 비해 실제로 유권자의 투표결정을 얼마나 변화시켰는지 하는 데 있다. 지역의 정치엘리트나 당조직을 통한 비공식적이고 통제된 지역주의 동원의 가능성 역시 마찬가지의 문제를 갖는다. 실제로 이러한 방식으로 지역주의가 동원되었다해도 그 범위는 당원 혹은 준당원에 국한되고 더 확대한다해도 정당과 후보에 대해 강한 지지를 갖는 유권자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의 투표결정은 지역주의의 개입을 가정하든 안하든 고정적이다. 요컨대 정당의 지역주의 동원을 변인으로 정초선거의 결과를 설명하는 것은 전혀 충분치 못하다.
7. 새로운 문제로서 지역주의
사실 냉정하게 말하면, 지역주의 때문에 지역주의 투표가 나타났고 지역정당체제가 만들어졌다는 설명은 민주화 정초선거 이후에 등장했다고 할 수 있다. 지역주의 내지 지역균열의 여러 요소들이 권위주의 산업화시기 등장했지만, 적어도 민주화이전까지 사회적 이슈로 부각된 예는 매우 드물었다. 엄밀히 말해 지역주의는 민주화 이후 한국정치의 새로운 이슈로 등장한 것이다. 이는 다음의 데이터가 잘 보여준다. 아래 자료는 국회도서관이 제공하는 자료검색 시스템에서 지역문제 관련 학위논문과 단행본 그리고 정기간행물에서 논문의 형태로 출간된 자료의 수를 가리킨다.
<표 3> 지역문제 관련 연구현황 : 1977~1999년
1977~19861987~1999정기간행물298석박사 학위논문017단행본017
분명 지역문제가 학술시장의 영역에서 유인력있는 주제로 주목된 것 역시 민주화 이후 시기이다. 민주화 이전 시기 지역문제 연구빈도는 성, 세대 등과 같은 다른 주제의 빈도와 비교한다면 사실상 무시될 수 있는 크기이다. 학술시장뿐 아니라 여론시장의 영역을 살펴보아도 동일한 양상이 나타난다. 아래 자료는 일간신문에서 지역이슈의 출현빈도를 시기별로 나타낸 것이다.
<그림 6> 지역이슈의 시기별 출현빈도 : 1920~1997년
* 지역이슈 출현빈도는 조선일보에서 ‘지역감정, 지역차별, 지역소외, 지역갈등, 지역주의, 지역분할, 지역격차, 지역색, 지역대통령, 지역당’의 단어를 포함하고 있는 기사의 수를 가리킨다. 조선일보를 선택한 이유는 9개 종합일간지 통신사이트 중 유일하게 1990년부터 기사본문을, 그 이전 1920년부터 기사제목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90년 이후는 역대기사 중 ‘본문’ 항목에서 위의 키워드를 통해 검색하였고, 87년부터 89년 사이는 수작업을 통해 동일한 방법으로 기사수를 계산하였다. 1987년 이전 시기는 역대기사 중 ‘기사제목’ 항목에서 동일한 방법으로 검색하였다. 1971년과 1980년에 발행된 신문을 조사해본 결과 본문을 포함한다해도 결과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특징적인 것은 민주화 이전 시기까지 여론시장에서 지역과 관련된 이슈가 거의 주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에서 지역문제가 갖는 성격, 즉 한국의 지역문제는 자율적인 시민사회의 영역에서 사회적 갈등을 분기시키는 요소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민주화 이전이든 그 이후이든 지역감정을 주제로 한 기사의 내용구성이 갖는 특징은, 취재대상(유권자)의 의식을 나타내기보다는 담론생산자(기사작성자)의 시각이 개입된 해석으로 나타난다는 데 있다.
기사의 소재와 관련해서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이 주목된다. 첫째는 정치관련 기사 중 지역감정과 관련된 소재의 중요성이 매우 높게 평가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지역문제가 민주화 이후 여론시장에서 기사가치가 높은 소재로 새롭게 등장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지역관련 기사의 출현빈도는 사실상 지역감정으로 관련시킬 수 있는 소재의 빈도를 거의 완벽하게 반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지역관련 기사의 거의 절대다수가 정치행위자들의 언술(statements)을 소재로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문화적이고 경제적인 특성에 기반을 둔 일반적인 지역주의 문제와는 달리, 한국의 지역주의 문제는 국가권력의 장악을 둘러 싼 정치경쟁의 차원에서 나타나며,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권력효과의 문제(최장집 1988; 1996)로 잘 포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역이라는 요소와 관련되었다 해서 모든 문제를 지역주의의 문제로 환원해서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권위주의 정권의 폐쇄적 엘리트충원방식과 거점육성방식의 불균등산업화가 낳은 경제개발 혜택의 지리적 불평등성 등 지역주의의 원인으로 꼽히는 문제들 역시 권위주의의 유산과 구조를 개혁하는 합리적인 차원의 문제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아마도 1987년 정초선거에서 반대당이 분열되지 않았거나, 혹은 권위주의 정치세력이 재집권에 실패했다면 한국의 지역주의 문제는 정치적으로 그리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 이후에라도 정치경쟁이 보다 개방적인 이념적 범위 안에서 시민사회의 다양한 요구를 대표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면 그에 비례해 지역 간 표의 분절성도 빠르게 줄었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지역주의를 둘러싼 이슈가 감정적 혹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논의되는 경향도 제어되었을 것이다. 요컨대 한국의 지역주의 문제는 지역의 차원과 관련된 문제라기보다는 한국 민주주의의 질과 보다 깊이 관련된 문제라는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독립변인으로서 지역주의의 설명력이 약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민주화를 기점으로 지역정당체제가 등장할 수 있었나 하는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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