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과 한국의 민주화, 그리고 광신주의

2013-05-15 16:19:49, Hit : 3252

작성자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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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7월 출간될 <광신>의 저자 알베르토 토스카노가 한국어판 서문을 보내 왔습니다.


최장집 선생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비롯해 5.18에 대한 이야기까지 한국어판 서문을 쓰기 위한 저자의 성실한 노력이 돋보이는 글입니다. 5.18과 한국의 민주화, 그리고 광신주의를 연결시키고 있는 토스카노의 서문을 공개합니다.


원저작권사인 Verso의 블로그에는 5.18 당시 사진이 “광주 대학살”이라는 이름으로 캡쳐되어 있네요; (원문보기) http://www.versobooks.com/blogs/1286-fanaticism-to-write-a-history-of-a-thing-without-history




* 이 글은 아직 교정 전의 판본으로 인용은 출간본에 실린 판본을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국어판 서문



종교적 동기를 가진 폭력의 모호하지만 장대한 부활에 넋을 잃었던 세 번째 천년의 초반 몇 년 동안 사람들은 서양 정치의 어휘 목록에서 뜨거운 감자와도 같던 용어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목격했다. ‘광신’이라는 용어가 그것이다. 사회적 격변, 혁명적 시기, 종교전쟁, 정당성의 위기, 제국의 기획―지난 5세기 동안 이 모든 계기들은 한쪽에 치우친 신념과 다루기 힘든 믿음을 가졌기에 타협의 범위를 벗어나 버린 구제불능의 적들에 낙인을 찍는 데 광신이라는 용어를 불러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천년왕국운동에 참여한 독일 농민들, 반제국주의적 기치를 내건 ‘데르비시’ 반란자들, 공포정치를 편 자코뱅 당원들, 폭탄을 던지는 아나키스트들, 반노예제를 주장하는 ‘즉각주의자들’, 종말론적인 스탈린주의자들은 이 강력한 관념(광신)을 적대적인 의미로 활용하기 위한 탐구의 대상이 된 수많은 집단들 중 불과 일부일 뿐이다. 광신에 대한 역사적 의미론과 논쟁적 배치를 파헤쳐 보면 무엇보다 이 용어가 놀랄 만큼의 가소성可塑性을 지녔음이 드러난다. 컬트적인 미신과 억제되지 않는 합리성, 진보의 거부와 진보에 대한 지나친 예찬, 고집스러운 특수주의와 팽창적인 보편성 등은 모두 광신 비판이 노리는 과녁들이었던 것이다.



이는 부분적으로 광신이 정치적으로 오용되는 용어인 극단주의extremism와 가깝다는 점으로 설명된다. 이 두 용어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입장이라도, 온건함이나 정상성의 기준으로부터 충분히 멀어지는 한 이들은 동일한 결점을 가진 것이 될 수 있다. 우파와 좌파의 과도함에 대한 중도파의 맹비난은 흔히 이런 형태를 취한다. 1970년대 이탈리아의 테러리즘에 대해 기독교민주당이 적용했던 “양극으로 수렴되는 극단주의”라는 독트린에서처럼 말이다. 하지만 정치적 비방 문구 중에서도 광신은 자신만의 내력을 갖고 있는데, 여기에는 광신이 정치적 신학 및 신학적 정치와 결합됨으로써 등장하는 두 가지 요소가 핵심적으로 포함된다. 첫째, 광신은 타협을 꺼리는 신념의 윤리로 규정된다. 둘째, 광신은 실용주의와 중재를 무시하는 이념적 원칙을 가지는 관념의 정치에서 생겨난다. 취약하고 단속적인 광신의 역사에서 이러한 특징들을 전면으로 끌어올린 것은 관념적 이성을 통한 평등주의적 독재를 내세운 프랑스혁명에 대한 반응이었다. 특히, ‘이성의 광신’―종교적 광신을 끈질기게 규탄했던 계몽철학자들의 태도와는 대부분 아귀가 맞지 않는―이라는 반동적 비유가 이름을 떨쳤던 때가 바로 이 시기였다. 종교적인 모양을 갖췄든 세속적인 모양을 갖췄든 간에 비타협적 태도와 관념이 어떻게 모종의―로베스피에르에 대한 최근의 전기 제목을 인용하자면―“치명적 순수함”과 결합될 수 있는지를 포착하기란 어렵지 않다. 정치적 광신에 대한 20세기와 21세기의 공격 역시 지속적으로 반혁명적 사유의 무기고(자유주의든, 보수주의든, 조제프 드 메스트르Joseph De Maistre와 같은 맹렬한 반동이든)에 빚지고 있는데, 이러한 반혁명적 사유에 다르면 사회를 “관념화하고 평등화하려는” 분기탱천한 혁명적 시도―평등과 인권이라는 “가공할 허구”를 실현하기 위해서 사회로부터 계층, 위계, 관습, 차이를 없애 버리려는―는 결국 폭정과 파국에 이르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광신』을 쓰면서 나는 두 개의 독특하고 역설적인 도전을 스스로 설정했다. 첫째는 역사 없는 것에 대한 역사를 쓰는 것이었다. 광신에 대한 담론은 거의 예외 없이 비난하는 것일 뿐 아니라 광신을 종교적・정치적 삶에 있어 근본적으로 비역사적인 병리 현상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한 상황은 광신을 역사적 혹은 지리학적 맥락에서 벗어난 유사성으로 쉽게 취급하게 만든다. 토마스 뮌처의 급진적 개혁 운동은 나치 독일과 볼셰비키 러시아 정권과 한 쌍이 되고, 호메이니는 피렌체의 이단자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고대 로마의 여신 숭배 제의(‘광신도’fanatici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한다)는 반식민주의 반란을 예시豫示하는 격이다. 우리의 지배 이데올로그들이 쓰는 ‘극단주의 원형 지대’와 ‘악의 축’ 같은 표현들은 이런 전통 속에서 자연스럽게 활용된다. 둘째, 나는 우리의 정치적 어휘 사전에서 가장 논쟁적이고 혼란스러운 용어 중 하나를 탐구함으로써 오늘의 시대 상황에서의 정치적 도전 및 가능성에 관한 일정한 지향점을 찾아보려 했다.



지난 10년 동안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는 계몽주의적 이상에 대한 대중적 인지도가 급증했다. 정치 지도자들과 공적 지식인들은 호전적이고 신학적이며 인구학적인 위협에 맞서 세속주의, 관용, 무신론, 과학을 옹호하자는 요청을 쏟아 냈다. 서양의 자멸을 깨달은 신보수주의자들과 이성의 후퇴를 한탄하는 진보주의자들은 ‘빛’Lumières과 ‘계몽’Aufklärung의 정신을 회복하는 데 열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인간 능력의 발전을 깎아내리고 지성을 저하시키는 이러한 권력에 맞선 싸움을 고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추세 속에서 찾을 만한 영감靈感은 거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임마누엘 칸트가 “우리가 스스로 초래한 미숙함”이라고 부른 것으로부터 집단적 해방을 이룬다는 생각은 우리가 사는 신자유주의 시대에서는 유토피아적 오만함이나 전체주의적 망상의 기운을 풍긴다. 자기비판으로 지탱되는 열린 기획으로서의 계몽주의에 대해 다소 입에 발린 말을 하는 일은 있겠지만, 우리가 가장 자주 대면하는 것은 불안한 소수 특권층의 정치제도와 경제 행위, 그리고 모든 가능한 세계 중 가장 덜 나쁜 것으로서의 동시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떠들썩한 옹호다. 현재 부활하는 계몽주의는 따라서 부정적이고 논쟁적인 계몽주의로, 이성의 도움으로 자신의 원칙들에 질문을 던지는 위험한 과업을 수행하는 데는 거의 관심이 없이 ‘우리의 가치’, ‘우리의 문명’을 가장하면서 자신의 문화적 독점 형태를 반대하는 적들을 파악하는 데만 열을 올릴 뿐이다.



비이성과 미신에 가하는 채찍으로서 볼테르가 얻고 있는 인기는 이런 상황에서 기인한다. 『광신, 혹은 예언자 마호메트』와 『철학사전』 등의 텍스트를 통해 계몽주의의 숙적으로서의 광신자, 역으로 관용의 전사로서의 철학자라는 불후의 초상을 그렸던 이가 바로 볼테르였다. 여기서 광신은 모든 반대 의견이나 믿음을 파괴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 종교적 정신의 정치적 도착倒錯이자 신의 규율에 대한 파괴적이며 전염적인 집단적 고착―이런 이미지는 흔히 전제적 ‘오리엔트’ 지역의 문화로 대변되는데―이다. 볼테르는 비합리성의 많은 측면들을 열거하는 데는 뛰어나지만, 그가 묘사하는 광신의 기저에는 근본적인 단순성이 존재한다. 그는 “모든 광신자들은 똑같은 붕대로 눈을 가리고 있다”고 쓴다. 비이성은 궁극적으로 통일적인 것이며, 관용과 광신 사이의 전투는 두 대립적 진영 간의 명확한 구분을 이끌어 낸다는 그의 발상에는 위안을 주는 뭔가가 있다. 종교적・정치적 광신에 대한 우리 시대의 비난은 주로 볼테르의 이러한 논증법을 물려받고 있으며, 지정학적 맥락(헤즈볼라, 힌두트바Hindutva, 미국의 기독교 우파), 역사(예언자 마호메트에서부터 데이비드 코레시David Koresh에 이르는), 정치적 지향(히틀러와 레닌, 중세 천년왕국운동과 신보수주의 선동가들)을 자유자재로 아우르는 이성의 적들에 대한 목록을 작성하기를 즐긴다.
궁극적으로는 동일하게 비타협적이면서도 이렇게 경쟁하는 교의敎義들로 빚어지는 참사에 맞서기 위한 치료법은 세속주의인 것처럼 보인다. 볼테르의 사유 중 또 하나의 요소는 ‘서양 문명’의 결실을 옹호하는 우리 시대의 경향과도 중요하면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니, 해방보다 (종교전쟁과 종파 간 박해의 재발을 어떻게든 피하면서) 사회적 평안을 우선시하는 태도가 그것이다. 무신론을 의심하면서 국가의 강압을 통한 세속적 질서의 집행(예카테리나 2세의 러시아나 오토만 제국의 경우)을 지지하는 볼테르의 태도는 이러한 현재의 경향과 잘 맞아 떨어진다.
광신 비판의 역사적 유산에 직면할 때, 자칭 세속주의자들과 무신론자들이 곤란한 입장에 빠지는지의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비록 어떤 상황에서는 필수적이라고 해도 관용과 광신의 대립은 기존의 강압적 권위에 대한 옹호로, 또 세속주의의 옹호는 타당한 저항마저도 언제나 비합리적인 것으로 취급하면서 억압을 정당화하는 제국주의적 세계관의 부활로 쉽게 변할 수 있다. 역으로, 무신론적 정치는 온건함과 사회적 평안을 가장 중요한 정치 행정의 원리로 간주하는 저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로부터 광신으로 지목받게 될 것이다. 광신―어떤 원칙과 믿음에 있어 타협을 거부하는 태도―을 내부의 적이 아닌 합리성의 내밀한 차원으로 취급하는 계몽주의에 충실할 때만 우리는 비판과 해방의 정신으로 이런 문제들에 대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유럽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수반하는 폭력 및 유럽 중심적인 역사철학과의 관련 측면에서 계몽주의를 다시 보는 것 뿐 아니라, 계몽주의의 내적 분열, 다양성,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조나단 이스라엘Jonathan Israel의 기념비적 저작의 제목[『계몽주의의 쟁점들』Enlightenment Contested]을 활용하자면, ‘쟁점들’까지도 고려해야만 한다.
우리가 꽤 게으르게도 ‘[유일한] 계몽주의’the Enlightenment라고 지칭하는 개념에는 광신을 비난하고 자유・비판・합리성을 옹호하는 일 사이의 관계에 대한 낯설고 불편한 비전들을 품고 있다.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글을 살펴보면, 광신은 합리성의 번영을 외부에서 위협하는 존재로 표상되기보다는 이성의 가능한 형태 중 하나로 등장한다. 칸트의 비판 기획은 정신이 자신의 경계를 넘어서면서, 그의 표현에 따르면 “무한한 것을 볼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성과 함께 날뛰는” 경향을 해결하려고 애쓰고 있다. 칸트는 광신에 대해 종교적 편협함에 바탕을 둔 망상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오만하게 초월하면서 이성의 힘을 남용하는 것으로 다루며 살핀다. 광신이라는 질병을 규정하는 것은 편협성과 특수성이 아니라 보편성의 과도함 같은 것이다.



역사철학을 만들어 내려는 헤겔의 시도―칸트라면 절대정신을 파악한다는 헤겔의 주장이 광신적이라고 여겼을 것이 틀림없다―역시 광신을 하나의 보편주의, 즉 “관념에의 열정”으로 다루고 있다. 이는 그가 이슬람교의 팽창과 프랑스혁명에서 공히 광신을 인지했던 것에서 알 수 있다. 사실상 종교적 권위와 사회적 특권에 맞서 인간의 권리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했던 프랑스혁명이야말로, 오늘날의 소위 세속주의적 정치 해설가들 대부분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방식으로 광신 문제를 완전히 전환시킨 사건이었다.



프랑스혁명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반응은 계몽주의에 대한 논의를 역전시켰다. 이제 계몽주의는 자신의 광신적 성격을 이유로, 즉, 자유, 평등, 연대의 원칙에 대해 완고하고 불안정한 정치적 옹호를 할 수 있도록 무대를 차려 주었다는 이유로 공격을 받게 된 것이다. 에드먼드 버크가 “정치적 형이상학자들”에 의해 초래된 참화에 맞서 위계, 종교, 관습, 점진적 변화가 가진 문명적 기능을 지지하면서, 합리적 철학을 시민적 헌법의 기반으로 변모시키려는 시도를 맹렬히 비난했던 것은 유명하다.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1790)―반광신적 논증의 역사에서 분수령이 된―은 혁명의 배후에 있던 악당 같은 변호사와 선동가들의 위험한 형이상학적 관념들, 데카르트적 기하학을 프랑스의 매끄러운 물리적・사회적 지형 위에 위험스럽게 투사하는 행위, 그리고 모든 가치를 단순한 “종이”로 변형시키는 허구적 금융 투기 장치들을 지속적으로 결부시킨다. 파괴시킨 후에 다시 건설하려는 사람들, “[자기] 나라를 단지 백지위임장으로 여기는 나머지 자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 위에 휘갈겨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맞서서, 버크는 “보존과 개선”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순수한 관념의 자식일 뿐 아니라 제도화된 관습의 지혜에 대한 무관심인 급진적 새로움은 문명사회의 적이다. “새로운 정부를 만들어 낸다는 발상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역겨움과 공포로 충만하게 된다.” 정부라는 것은 “국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 다층적인 구성체와 관계된 내・외부의 다양하고 복잡한 이해관계를 포괄적이고 연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즉 복잡성을 다루는 것에 관한 문제이다. 따라서 “국가를 구성하거나 혁신하거나 개선하는 것을 다루는 학문은, 다른 모든 실험적 과학과 마찬가지로, 선험적으로 가르칠 수 없다.” 제대로 된 정부는 편견과 환상―사회적 교류가 가진 측면으로, 프랑스혁명의 안내자인 광신적 합리주의는 이를 없애 버리려고 하는데―을 관용하거나, 심지어 이를 함양할 필요도 있다고 버크는 주장한다.


버크의 공격은 아이티 혁명가들과 (‘광신자’라는 별칭을 거부하지 않았던 극소수 집단 중 하나인) 미국의 ‘관념적인’ 노예폐지론자들에 대한 공격의 본보기를 세웠으며, 공산주의라는 ‘정치 종교’에 대한 냉전 시기의 비난으로, 나아가 급진적 정치를 광신적으로 보는 현재까지 보편화된 견해로 이어져 내려왔다.
비타협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정치에 대한 오늘날의 비판자들은 대개 버크의 날카로운 감각과 반동적 달변을 되살려 내지는 못하는 반면, 에티엔 발리바르를 따라 ‘대중에 대한 공포’라고 요약될 수 있는 오래된 전통(서양 정치철학 및 전 지구적 지배 이데올로기와 많은 면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을 이어오고는 있다. 급진적 적대를 통치하기, 반대편을 해산시키기, 극단적인 실천적 이성을 안락사 시키기―이것들은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적 갈등 관리가 일반적으로 설정하고 있는 목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일들은 냉전 시대의 반공산주의의 연장선상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의 보호를 받으며 행해진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동양과 서양 모두에서 광신의 위협과 나란히 놓인 것은, 착취와 배제의 사회적 관계를 재생산하는 일과 모순되지 않도록 미리 틀 잡힌, 민주주의적 과정이라는 이름의 무력하고 절차적인 개념이다. 국가 부채 위기에 대한 유럽의 계속되는 반응이 경제를 뛰어넘는 인민주권이라는 주장을 내팽개치는 데 있다는 사실이 보여주듯이, 자본주의 하의 민주주의는 ‘관리되는 민주주의’라는 푸틴식 구절을 통해 완곡히 표현된 조건을 향해 가는 경향이 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서 최장집이 관측하듯이, 이러한 현상은 민주주의의 평등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주장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축소되는 경향 뿐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운동에 의한 민주화가 민주화의 엘리트적 변형태에 의해 압도됨으로써 민주주의의 사회적이고 주관적인 내용을 제거해 버리는 일종의 그람시적인 수동적 혁명 역시 포함하고 있다(케빈 그레이Kevin Gray는 “한국의 정치 문화”The Political Cultures of South Korea라는 통찰력 있는 논문에서 당대 한국 정치를 해석하는 데 이러한 그람시적인 렌즈를 활용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의 사례는 광신적이며 관념적 신조로 그려졌던 공산주의라는 ‘정치 종교’에 맞선 전투가 어떻게 모든 저항적・해방적 에너지를 중성화하려는 시도를 지속적으로 강화하는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제공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가령 한국과 ‘전환’ 이후의 동유럽, 혹은 미국에서의 ‘사회주의’라는 영속적 허수아비를 비교하는 것처럼, 반공주의의 이러한 탈정치적 기능을 정치 문화를 가로질러 비교해 보는 것도 유용할 듯하다). 최장집이 말하는 것처럼 “일상의 권위주의, 노동의 배제, 차별과 특권 체제, 다른 의견의 억압, 강력한 규격화 경향 등은 한국의 사회구조와 그 하부 체제 속에서 내재화된 냉전적 반공주의의 일면이다.” 이는 진정 광신이라는 개념에 대한 가장 우선적 ‘활용’ 사례 중 하나라 할 수 있으니, 곧 더 많은 평등과 인민의 통제를 위한 어떤 운동에 대해서도 극단적 대격변이라는 위협[북한의 침략]을 유지시킴으로써 지배, 불평등, 특권을 공고히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관리되고 수동적인 민주주의 이데올로기 및 실천은―보통의 상황에서는 급진적 인민 행동의 순간들에 관한 담론과 상징을 참조하는 경향이 있는 정당성의 언어에 기댄다는 점을 고려할 때―저항적이고 팽창적인 민주주의의 개념과 양가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중에 대한 ‘민주주의의’ 공포라는 것은 불안하고 불안정한 구상이다. 우리가 오늘 이집트와 튀니지에서 목격하고 있듯이, 지배 권력은 (알랭 바디우가 타흐리르 광장을 지칭하면서 “공산주의 운동”이라고 불렀던 바로 그) 혁명적 민주주의의 순간을 중성화neutralise시켜서 그것을 사라지는 매개자로 변모시키려고 애쓴다. 그럼으로써 권력의 균형은 달라지더라도 정치체의 사회적・경제적 토대가 전면적으로 변환되지는 않도록 조정된 상황을 통해 기존 질서는 재생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천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 모든 민주주의는 자신의 혁명적 적통을 자랑스레 알릴 때조차도 이러한 중성화와 맞물려 있었다(예컨대 에릭 홉스봄이 『마르세유의 메아리』Echoes of the Marseillaise에서 논의하고 있듯이, 프랑스의 경우에도 1989년에 혁명적 토대의 순간[프랑스혁명] 자체를 거의 부인할 뻔 했던 시도가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1980년 광주항쟁 및 코뮌을 민주화의 서사 속으로 포섭하고 중성화하려는 시도(김용철이 “한국 정치의 민주화 속 광주항쟁의 그림자”The Shadow of the Gwangju Uprising in the Democratization of Korean Politics라는 논문에서 이야기했듯이)를 볼 수 있었는데, 이는 (안토니오 네그리의 용어를 빌면) 구성적 권력의 파열적 순간이 이미 제정된 권력에 의해 폐기처분되는 광범위한 패턴에 속한다. 광주를 출발점으로 삼는 정치사와 정치 이론은, 인민의 지배라는 놀랍고도 고무적인 실험을 회복함으로써 급진적 평등을 현실화하려는 우리 시대의 시도들에 많은 교훈을 주는 것 외에도, 당대의 급진적 이론이 작동하고 있는 지리학적・문화적으로 제한된 참고문헌(혹은 사건)들을 깨부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나는 조지 카치아피카스George Katsiaficas의 글들, 특히 최근에 나온 『아시아의 알려지지 않은 항쟁들, 1권: 20세기 한국의 사회운동』Asia’s Unknown Uprisings, volume 1과 광주항쟁에서 이론적 영향을 받은 정근식의 논문 “5・18 항쟁의 경험과 공동체적 상상력”The Experience of the May 18 Uprising and the Communal Imagination에 힘입어 이 정치적 순간[광주항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책과 관련해서, 광주 코뮌은 흔히 광신적이라는 엘리트주의적 비난 아래 무시되었던 정치적 행동의 형태를 취급할 때 공동체community와 공통의 것the common을 포함해 코뮌commune과 더불어 시작하는 용어 범주에 대한 부단한 고찰을 요구한다는 점을 시사한다(이는 공산주의communism라는 바로 그 테마로 되돌아가는 것이며, 당연히 공산주의는 이 책의 곳곳에서 매우 핵심적인 용어이다).



고故 조엘 올슨이 광신의 “경멸적 전통”이라고 이름 붙였던 것의 관점에서 보면, 광주가 증명하는 일종의 직접 민주주의(혹은 심지어 ‘공유화’communisation)는 비타협성, 대의 체제의 부재, 생산・재생산・억압 수단의 인민 전유가 혼합되어 있음을 드러내는데, 이는 관리되는 민주주의의 정반대로서 일종의 ‘관리될 수 없는 민주주의’를 체화하는 것이다. 수동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민주주의가 급진적 민주주의로부터 자신을 분리한다는 면에서 보면, 전자는 광신이라는 붓으로 후자를 먹칠하는 방식으로 그 분리를 실행할 것이다. 카치아피카스가 열거하는 광주 코뮌의 특징들은 (1970년대의 민주주의의 ‘위기’, 다시 말하면 민주주의의 과잉에 대한 새뮤얼 헌팅턴의 악명 높은 삼국위원회[미국, 유럽, 일본] 보고서로부터 교훈을 끌어내는 방식의) 지배적인 ‘반광신적’ 민주주의 개념을 하나하나 전도顚倒시킨 것이기도 하다. “(1) 민주적 의사 결정을 가진 민주적 인민 조직의 자발적 등장, (2) 아래로부터의 무장 항쟁 출현, (3) 도시 내 범죄의 감소, (4) 시민들 사이에서 진정한 연대와 협력의 실재, (5) 계급, 권력, 지위 같은 위계의 부재, (6) 참여자들 사이에서 노동의 분업이 발생.”



나는 카치아피카스가 제시한 사건의 연대기에서도 그랬듯이 특징들의 목록을 보면서, 광주 코뮌이 평등의 정치를 균질성과 무차별성(내가 책에서도 쓰고 있듯이, 이것은 관념이나 잡종성이라는 외양을 띠기도 하는데)의 힘으로 여기는 지배 담론의 경향을 반박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게 된다. 지배 담론과는 반대로, 우리가 보고 있는 이 특징은 위계의 해체이면서 ‘노동 분업’의 발명인데, 이는 다시 말해 관리되는 자본주의적 형식과 적대하는 절합, 매개, 심지어 재현의 새로운 형식을 발명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광주와 같은 평등주의적 순간들이 갖는 단일한 성격에 대한 과도한 강조―가령 최정운의 ‘절대적 공동체 이론’ 같은―가 광주라는 사건을 융합과 무차별성의 렌즈로 바라보면서 그것을 필연적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는 해방의 순간적 반짝임으로 여기는 급진적 민주주의 혹은 공산주의의 이미지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오히려 광주는 알랭 바디우가 “의회 자본주의”라고 적절히 이름 붙인 중성화 과정의 바깥에서 평등을 건설하고 표현하는 실험적 토대에 더 가까운 사건임에도 말이다.



반대와 저항을 악마화하고 문화화하거나 중성화하기 위한 광신 개념의 지배적 활용을 비판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는 정치적 사유가 급진적・비타협적 평등을 개념화하는 대로 우리의 정치적 상상이 중첩 결정되는 방식에 대해 더 철저히 고찰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저항적 평등이 가진 비재현적이고 순간적이며 융합적인 성격과 민주주의 행세를 하는 매개 기구와 책략을 대비시키면서 익숙한 상대편의 용어를 단순히 전도시키기만 하거나, 흔히 멜랑콜리에 빠진 좌파가 그러듯 저항은 타협을 거부하는 결연한 의지라는 천상의 흔적들만을 남긴 채로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는 지배적 생각을 수용하게 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 광신 담론 및 정치의 가능성에 대한 지배적 이미지를 넘어서 움직인다는 것은 우리의 관리자들이 부과한 용어와는 다른 민주주의를 표현하는 긍정적 어휘를 발전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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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7 2013-08-02
310 한 줄 인용
  민주주의와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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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9 2013-07-18
309 한 줄 인용
  감히 나서는 것으로서의 민주주의 
 펀짱
2950 2013-07-04
308 신간이야기
  2013년 하반기 출간 예정 도서 
 관리자
3174 2013-07-02
307 신간이야기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서문 엿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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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2 2013-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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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론에서 본 '거리로 나온 넷우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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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4 2013-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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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글입니다  22 
 관리자
3 2013-05-21
304 편집일기
  <한국 사회 불평등 연구> 정오 사항입니다. 
 未貞
2935 2013-05-20
편집일기
  5.18과 한국의 민주화, 그리고 광신주의 
 관리자
3252 2013-05-15
302 신간이야기
  <어떤 민주주의인가>+<논쟁으로서의 민주주의> 북 트레일러 
 관리자
2744 2013-05-14
301 신간이야기
  <한국 사회 불평등 연구>언론리뷰. 
 未貞
49911 2013-05-02
300 편집일기
  [냉전의 추억] 희망의 길, 공동 번영의 땅, 개성공단 
 끄로마뇽
2775 2013-04-29
299 신간이야기
  최장집 교수의 신간 <논쟁으로서의 민주주의> 
 관리자
2896 2013-04-26
298 신간이야기
  자유인 인터뷰 북트레일러~ 
 윤상훈
2524 2013-04-12
297 신간이야기
  [신간] 우리 시대 27인의 이야기   2
 끄로마뇽
2862 2013-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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