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서문 엿보기

2013-06-24 01:30:56, Hit : 2642

작성자 : 관리자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셸던 월린 지음, 우석영 옮김 (2013년 7월 출간 예정)


서문

오해의 가능성을 피하고자 먼저 이 책에서 채택된 접근법의 일정한 특징들에 대해 몇 마디 강조해 두고자 한다. 비록 전체주의가 이 책의 중심 개념이긴 하지만, 나의 논지는 현 미국 정치체제가 나치 독일의 정치체제로부터 영감을 받은, 나치 체제의 복제물이라거나 또는 조지 W. 부시의 정치체제가 히틀러 체제의 복제물이라는 것은 아니다. 히틀러 시대 독일에 대한 언급은 해외 침탈적이고, 선제공격을 공식 독트린으로서 정당화하며, 국내의 모든 반대 세력을 억압했던 한 권력 체제의 특징들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해 소개된다. 원칙적으로 또한 실천적으로 잔인하고 인종주의적이며, 철저하게 이데올로기적이고, 세계 지배 야욕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하나의 권력 체제 말이다. 그런 특징들은 헌정 민주주의의 근본 원칙들에 역행하는 현 권력 체제의 경향적 특징을 밝히기 위해 소개된다. 내 생각에 그 체제의 경향적 특징들이란, 그것들이 통제control・확장expansion・우월성superiority・최고supremacy에 미쳐 있다는 의미에서, ‘전체주의화함’totalizing이다.
무솔리니와 스탈린 정권은, 전체주의가 상이한 여러 다른 형태들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준다. 예컨대, 이탈리아 파시즘은 그 정권 말기에 이르기 전까지는 반反유대주의를 공식적으로 채택하지 않았는데, 그것을 공식적으로 채택했을 때조차, 그 채택의 결정적 이유란 독일로부터의 압력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일부 ‘진보적’ 정책들을 도입하기도 했다. 대중 문맹률 퇴치 촉진, 공중 보건 증진, 여성들의 전문직・기술직 종사에 대한 장려, 그리고 (잠깐 동안이긴 했지만) 소수자 문화 장려와 같은 정책들 말이다. 물론 이런 ‘성취들’로 말미암아 (그 공포의 실상이 아직까지도 완전히 이해되지 않은) 스탈린의 범죄들이 상쇄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전체주의는 지역적으로 변형된 꼴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가능한 전체주의는 그 20세기 판본들로 인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도 아닐뿐더러, 이전의 전체주의 체제들을 훨씬 뛰어넘는, 통제와 협박 기술, 대중 조작 기술을 확보하고 있다.
나치와 파시스트 정권에 에너지를 공급한 것은 혁명운동들이었는데, 그 운동들의 목표는 국가권력을 장악, 재구성, 독점화하는 것만이 아니라, 경제에 대한 통제권 역시 장악하는 것이었다. 국가와 경제를 통제함으로써, 혁명가들은 사회를 재구성하고 그리하여 인민을 동원하는 데 필요한 수단을 확보했던 것이다. 그와 반대로, 전도된 전체주의Inverted Totalitarianism는 오직 부분적으로만 국가-중심적인 현상이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기업 권력 시대의 ‘정치적’ 등장을, 그리고 시민들이 정치적으로 탈-동원됨을 의미한다.
사회를 미리 계획된 ‘전체성’으로 강제적으로 몰아넣고자 하는 자신의 의도를 노골적으로 자랑하는 고전적인 전체주의와는 달리, 전도된 전체주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명확히 개념화되지도 않으며, 공공 정책으로 객관화되지도 않는다. 전형적으로, 이것은 대체로 자신들의 행동 또는 비-행동의 좀 더 깊은 결과들에 대해 모르고 있는 듯한, 권력 신봉자들과 시민들에 의해 강화된다. 그들에게는 확실히 경솔함이 있다. 즉, 예상치 못한, 어떤 유형의 결과들이 어느 정도로 나타나게 될는지 심각하게 생각해 볼 능력이 그들에게는 없는 것이다.
이런 뿌리 깊은 부주의가 존재하는 근본 이유는, (이미 널리 알려진 바 있는) 변화에 대한 미국식 열정과, 또 그와 똑같이 놀랄 만한 것으로, (언제든 착취당할 준비 상태로 있던) 풍부한 자연 자원이 매장된 거대 대륙을 마음껏 소유할 수 있었던 미국인의 행운과 관련되어 있다. 미국 사회사가 간단없는 변화로 점철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진부한 말이지만,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오늘날의 증대된 속도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그다지 명확한 것은 아니다. 변화는 기존의 신념・실천・기대치를 대치한다. 비록 역사를 통해 사회들은 변화를 줄곧 경험해 왔지만, 혁신을 촉진하는 것이 공공 정책의 주요 초점이 된 시기는 오직 지난 4세기 동안뿐이다. 오늘날에는 테크놀로지 혁신에 대한 전 사회적 추구와 그것이 조장하는 문화 덕분에, 그 여느 때보다도 변화가 더 신속하고 더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더더욱 환영 받고 있다. 이는 곧 제도・가치・기대치가 모두 [한정된 시기에 제 역할을 다 하는] 테크놀로지와 함께 한정된 생존 기간을 지님을 의미한다. 우리는 지금 동시대성contemporaneity의 승리, 또 그 공모자인 망각 혹은 집단 기억상실증의 승리를 경험하고 있다. 달리 말해, 근대 초에 변화가 전통을 추방했다면, 오늘날 변화는 [오직] 변화를 이을 뿐이다.
끝없는 변화는 어떤 것이 단단히 고착되는 것을 방해한다. 예컨대, 내전[남북전쟁]이 종식된 지 1세기 이상이 지났지만 노예제가 초래한 결과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는 점, 또 여성 참정권이 쟁취된 지 1세기 가까운 세월이 지났지만 여성들의 평등권 투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점, 공립학교가 현실화된 지 거의 2백 년이 지났지만, 오늘날 교육은 점차 민영화되어 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라. 변화의 문제가 대체 무엇인지 가닥을 잡기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기억해 낼 수도 있겠다. 17세기 후반기 또 특히 18세기 계몽주의 시기의 정치인과 지식인 서클에서는, 역사상 최초로, 인간이 의도적으로 자신의 미래를 조형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확신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는 점 말이다. 과학과 발명에서의 진일보 덕택으로, 변화를 하나의 ‘진보’로, 즉 사회 내 모든 구성원들에게 혜택을 가져다줄 어떤 전진으로 여기는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 진보는 곧 생산적인 변화를, 무언가 새 것을 세계에 가져다줄 변화를, 만인에게 이익을 줄 변화를 의미하게 되었다. 진보의 투사들은, 비록 변화가 기존의 신념, 풍속, 이익의 소멸 또는 파괴를 초래할지도 모르지만, 이런 것들은 대체로 소수를 위해 봉사한 것들이었으며, 다수를 무지, 가난, 질병 상태에 있도록 한 것들이었다는 점에서, 사라져도 좋을 것들이라고 생각했다.
근대 초에 등장한 진보에 대한 개념화에서 한 가지 중요한 요소는, 변화를 그 결정에 책임이 있다고 여겨지던 이들에 의해 내려지는 정치적 결정의 문제로 보았다는 점이다. 변화에 대한 이런 이해 방식은 19세기 후반기에 나타난 경제 권력의 집중으로 말미암아 상당히 잠식되고 만다. 변화는 이제 착취 및 기회주의opportunism와 분리 불가능한 어떤 민간사업이 되었고, 그럼으로써 이는 자본주의 동학의 한 가지 주요 요소가 (비록 유일한 요소는 아니지만) 되었다. 기회주의는 이용할 수 있을 법한 것들을 향한 끊임없는 탐색 작업을 수반했고, 이 이용할 수 있을 법한 모든 것들은 곧 종교에서부터 정치, 인간 복지에 이르는, 사실상 그 모든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금기시되는 것은 거의 없었다. 머지않아 변화는 사전에 계획된, 이윤 극대화를 위한 전략의 목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변화는 그 여느 때보다도 더 신속하고, 더 광범위하다고 흔히 지적된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 나는, 미국 민주주의가 단 한 번도 제대로 공고화된 적이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들 가운데 일부는 여전히 [미국에서] 실현되지 못한 채로 남아 있거나, 매우 취약한 상태에 있다. 다른 요소들은 반反민주주의적 목적을 위해 사용되어 왔다. 정치제도는 한 사회가 변화를 관리하는 수단으로 흔히 기술記述되어 왔다. 이런 생각에 깃든 가정은, 정치제도 자체는 안정된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공적 권력을 사용할 수 있는 범위와 그 한계, 그리고 공직자의 책임성을 정의하는, 상대적으로 불변하는 구조물로서의 헌법의 이상理想이 예증하듯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 정치적 변화의 일부는 혁명적이지만, 다른 일부는 반反혁명적이다. 어떤 정치적 변화는 미국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을 계획하며, 이전 행정부에서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던 지점까지 미국의 권력을 안팎으로(안으로는 시민 감시, 밖으로는 7백여 개에 이르는 해외 군사기지) 동시에 팽창할 신기술들을 도입하고 있다. 또 다른 정치적 변화는 본디 중하층 계급의 삶의 향상에 그 목적을 두었던 사회정책들을 전도한다invert는 점에서 반혁명적이다.
현 시대의 정치가 실제로는, 정치 지도자, 대중매체, 싱크 탱크 제사장祭司長들이 말하는 것, 즉 세계에서 으뜸가는 민주주의의 표본이라고 말하는 정치체제와는 정반대의 정치체제를 향해 가고 있다는 점을 대체 어떻게 독자들에게 납득시킬 수 있을까? 비판자들은 이 책을 공상적인 작품이라 무시할지도 모르지만, 상당수의 시민들이 ‘이 나라가 향해 가는 방향’에 대해, 정치에서 거대 자본의 역할에 대해, 대중적인 언론 매체의 신뢰도에 대해, 투표 결과의 신빙성에 대해 점점 더 우려하고 있다고 믿을 만한 근거는 충분하다. 2006년의 중간 선거는 수많은 미국 시민들이 그릇된 전쟁을 신속히 종식시키기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말해 주었다. 평범한 시민들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불평 소리를 우리는 점점 더 많이 듣고 있다. ‘더 이상 [자신들은] 미국이라는 나라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제공격, 광범위하게 자행된 고문, 민간 사찰, 끊이지 않고 들리는 (기업과 공직) 고위층 인사의 부패 소식은 곧 미국 정치의 무언가가 심히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고, 그들은 불평한다.
이어질 장들에서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들과 그 방향을 이해하기 위해 하나의 지점에 집중해 보고자 한다. 하지만 먼저, 민주주의가 완전히 실현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미국은 상당수의 민주주의적 형식들을 갖추어 왔다고 가정하고, 추가적으로 어떤 근원적인 변화가 지금 일어나고 있다고 가정한 상태에서, 다음과 같은 큰 질문을 제기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민주주의를 어떤 비-민주주의 체제 또는 반민주주의 체제로 변형시키는 원인은 무엇인가? 또 민주주의가 변화해 될 그 정치체제는 대체 어떤 정치체제인가?
수세기 동안 정치 저술가들은, 만일 완전히 발달한 민주주의가 전복된다면(또는 전복될 때에는), 민주주의를 뒤이어 전제정치가 등장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민주주의는 그 스스로 허용한 거대한 자유 탓에 본디 무질서로 나아가기 십상이며, 자산계급으로 하여금 질서를 (필요하다면 무자비하게) 강제하는 독재자나 전제자를 지지하도록 유발할 공산이 크다는 주장이다. 하지만-이것이 우리가 지금 탐구하려고 하는 쟁점이다-어떤 민주주의가, 그 대중문화의 차원에서는 무엇이든 허용(‘무엇이든 다 된다’)하지만, 그 정치의 차원에서는 공포스러운 것이 되고, 나아가 ‘테러리스트를 박멸할’ 것을 약속하며, 그 박멸 노력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일 것이라 주장하는 지도자들에 대해 그 미심쩍은 바를 선의로 수용하는 민주주의라면 어쩔 텐가? 그렇다면 그 민주주의는 무질서하기[통치하기 어렵기]보다는 고분고분하고 사사화된 것으로 변하는 성향을 보이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은 시민과 그 정치 결정자 간의 권력관계를 변형시키지 않을까?


용어 사용에 대한 당부. ‘슈퍼 파워’Superpower는 바깥으로 확장해 가고자 하는 권력 지향을 의미한다. 슈퍼 파워는 확실히 그 한계를 규정하기 어렵고, 제약을 참지 못하고, 경계에 관심을 두지도 않는다. 자신이 선택하는 시간과 장소에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힘을 늘리려고 하는 속성이 있으니 말이다. 슈퍼 파워는 헌법[입헌] 권력의 정반대를 의미한다. ‘전도된 전체주의’’는 권력을 내부로 투사한다. 그것은 나치 독일, 파시즘 이탈리아, 스탈린주의 러시아로 대표되는 ‘고전적인 전체주의’의 한 파생물이 아니다. 이런 정권들의 동력은 국가권력을 쟁탈, 재구성, 독점하려는 목표를 지녔던 혁명운동들이었다. 국가는 사회의 동원과 재구성에 필요한 수단을 제공하는, 권력의 중심부로 이해되었다. 교회・대학・기업체・(뉴스와 의견의)언론・문화 단체들은 정부에 의해 장악되었거나 무력화되었거나 또는 억압되었다.
반면, 전도된 전체주의는 국가의 권위와 자원을 활용하는 한편 동시에, 복음주의 종교와 같은 다른 종류의 권력과 결합해, 또 ‘사적인’ 지배 체계와(그 표현체는 바로 현대의 법인 기업들corporations이다) 전통적 정부 간의 공생 관계를 부추기며, 자신의 동력을 확보한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은, 서로 다른 정체성을 지닌 동등한 동반자들이 공동으로 결정하는 체제가 아니라, 기업 권력의 정치 권력화를 의미하는 특정한 체제다.
18세기 후반기에 역사상 처음으로 하나의 지적인 구축물로 등장했을 때, 자본주의는 집중되지 않는 권력의 완벽한 형태로서 환영되었다. 절대군주제와는 달리, 그 어떤 단일한 사람이나 정부 기구도 지도・통제하려고 시도할 수 없고, 시도해서는 안 되는 어떤 체계로서 말이다. 그것은 통제되지 않고 있을 때 (자유방임, 자유 통과) 가장 잘 작동하는 비-집중화된 권력 체제로 그려졌고, 그리하여 ‘그 시장’은 자유롭게 운행되었다. 그 시장 체계를 통해, 자발적 경제활동들이 조정되고, 교환가치가 정해지며, 수요 공급이 조정될 것이었다. 아담 스미스Adam Smith가 한 유명한 말처럼, 그것은 그 참여자들을 서로 연결시키며, 그들의 노력을 모두의 공동 이익으로 귀결되게 하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운행되었다. 비록 개별 행위자들에겐 그들 자신의 이기적 목적이 행위 동기가 되긴 하겠지만 말이다.
스미스의 근본적인 주장 가운데 하나는, 비록 개인은 소규모의 차원에서 합리적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겠지만, 그 누구도 한 사회 전체를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그 활동 방향을 결정짓는 데 필요한 힘을 지니지는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1세기 후, 그 전체 규모의 경제활동은 법인 기업의 출현과 그 급속한 성장에 의해서 변혁되고 말았다. 권력이 헤아릴 수 없는 행위 주체들 사이에 고르게 퍼져 있던, 또 시장이 그 가정상 그 누구에 의해서도 지배되지 않았던 시절의 경제는 이제, 가격, 임금, 자재 공급 그리고 시장 진입 그 자체를 정할 수 있는(혹은 그것에 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집중된 권력 형태(트러스트, 독점기업, 모회사, 카르텔)로 대치되고 말았다. 아담 스미스는 이제 찰스 다윈과 결합되었으며, 적자생존의 원칙이 적용되는 자유 시장이 출현하고 만 것이다. 법인 기업의 등장은 그때까지 알려진 바 없는 수와 규모의 사적 권력의 출현을, 시민적 정체성과는 무관한 사적 권력의 집중을 의미했다.
정치과정과 경제에 대해 기업이 가진 권력에도 불구하고, 기업이 가진 권력과 그 영향력의 억지를 요청하는 단호한 정치・경제적 반대 세력 역시 등장했다. 거대 기업Big Business은 거대 정부Big Government를 필요로 한다고 주장되었다. 쉽게 망각된 것이지만, 거대 정부가(또는 심지어 작은 정부조차) 사심 없음을 제 기율로 채택하지 않으면, 두 세계 모두에 최악의 결과를 초래할지 모른다고, 기업 권력과 정부 모두 ‘자기 이익 추구’라는 동일한 옷을 입게 될지 모른다고 가정되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포퓰리스트들과 진보주의자들, 또 노동조합원들과 소농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민주주의 정부는 시장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민주주의 정부는 자신들의 [머리] 숫자가 곧 주된 힘의 원천이 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익과 공동 복리 양자에 봉사해야만 한다고 말이다. 생각건대, 순진하게도 그들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주권자는 인민이요 정부는 그 정의상 자기들 편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주권자인 인민에게는 자본주의 경제가 양산한 불평등을 바로잡기 위해 정부의 권력과 자원을 사용할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말이다.
이런 신념은 뉴딜New Deal 정책을 지지했고 또 뉴딜 정책을 통해 강력해졌다. [이 정책에 따라] 여러 가지 조정 기구들이 창설되었고, 사회보장 프로그램과 최저 임금법이 제정되었다. 노동조합이 단체 협상권과 더불어 합법화되었고, 공공사업과 보존 사업을 위한 정부 프로그램을 통해 대규모의 실업을 줄이려는 다양한 노력들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더불어 뉴딜 정책은 강제 동원, 경제 전체에 대한 정부의 통제, 성인 남성 대부분의 징집으로 말미암아 폐기되고 만다. 실제로 그 전쟁은 사회민주주의의 실험적 시작을 향한 미국 사회 최초의 대규모 노력의 종식을 의미했다. 그 전쟁은, 정치적으로 무세無勢한 이들을 대변하는 개인, 조직의 활기찬 정치 활동 그리고 강력하고 효과적인 선거 민주주의와 결합해 다수를 이롭게 하려 한 여러 사회보장 프로그램들 간 동맹의 종식을 의미했다.
정치적・사회적 민주주의 운동의 수레바퀴를 정지시킴과 동시에, 그 전쟁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되어 간, 기업과 국가 간 동거의 크기를 확대했다. 그들의 협력 관계는 냉전 시기(1947~93년) 동안, 그 어느 시기보다도 가까워졌다. 국가 자신의 야망이 거대 기업들의 그것처럼 더욱 확장되고, 더욱 전 세계적인 것이 되며, 또 때론 좀 더 호전적인 것이 되면서, 기업의 경제 권력은 국가가 의존하는 권력의 기초가 되었다. 국가와 기업은 함께, 과학과 테크놀로지가 대표하는 권력체들의 주요 후원자와 조정자가 되었다. 그 결과 출현한 것은 어떤 전례 없는 권력 결합체다. 즉, 자신의 전체주의화하는 경향성을 주된 특성으로 보여 주며, 기성 경계들에(정치적・도덕적・지적・경제적 경계들에) 도전할 뿐만이 아니라, 그 본질상 그 경계들에 끊임없이 도전하도록 되어 있는, 심지어는 지구 자체의 한계에도 도전하게 되어 있는 권력인, 전례 없는 권력 결합체. 이런 권력들은 또한 어떤 문화를 창조하고 유포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소비자들에게 정치적 수동성을 수용하라고, 그와 동시에 변화를, 사적인 쾌락을 마냥 환영하라고 가르치는 문화 말이다. 그 결과 나타난 한 가지 주요 현상은 공화주의적(18세기적 의미로서의 공화주의)이라기보다는 제국주의적이며 덜 민주주의적인 어떤 새로운 ‘집합적 정체성’의 형성이다. 이 새로운 정체성은 인민으로서 우리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우리는 무엇을 지지하고, 무엇을 지지하기를 우리 스스로 원하는가, 공적인 일에 우리는 과연 어느 정도 참여하기를 원하는가, 그들 국가의 운명이 대중의 통제 영역을 신속히 빠져나가고 있는 시대에, 과연 어떤 민주주의적 원칙이 [국가 또는 공동체에 의한] 시민의 에너지와 재산의 활용을, 일부 시민의 삶의 희생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인가, 등과 같은 질문들을 [우리에게] 요청한다.

이 책의 주요 개념인 ‘전도된 전체주의’를 실험적이고 가설적인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비록 미국 사회 내 특정 경향성들이 자기-통치, 법치, 평등주의, 사려 깊은 공공 토론으로부터 벗어나 전도된 전체주의의 웃는 얼굴인, 내가 ‘관리되는[경영되는] 민주주의’managed democracy라 불러온 것을 향해 가고 있다고는 확신하지만 말이다.
이 글을 쓰는 현재, 슈퍼 파워는 퇴각 중이며 전도된 전체주의는 완전히 성장한 하나의 실체라기보다는 강력한 여러 경향성들의 다발로 존재하고 있다. 이 경향성들이 향해 가는 방향은, 전도된 전체주의가 민주주의에 과연 무엇을 강요하는지, 또 우리가 우리의 천부적 권리를 한 접시의 야채수프와 교환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로(오직 민주주의만이 ‘우리’라는 말의 사용을 정당화한다) 하여금 자문自問해 보도록 재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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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제작일지
  셸던 월린 인터뷰,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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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7 2013-08-02
310 한 줄 인용
  민주주의와 거짓말 
 펀짱
3141 2013-07-18
309 한 줄 인용
  감히 나서는 것으로서의 민주주의 
 펀짱
2952 2013-07-04
308 신간이야기
  2013년 하반기 출간 예정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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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4 2013-07-02
신간이야기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서문 엿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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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2 2013-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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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론에서 본 '거리로 나온 넷우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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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 신간이야기
  <한국 사회 불평등 연구>언론리뷰. 
 未貞
49912 2013-05-02
300 편집일기
  [냉전의 추억] 희망의 길, 공동 번영의 땅, 개성공단 
 끄로마뇽
2775 2013-04-29
299 신간이야기
  최장집 교수의 신간 <논쟁으로서의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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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97 2013-04-26
298 신간이야기
  자유인 인터뷰 북트레일러~ 
 윤상훈
2525 2013-04-12
297 신간이야기
  [신간] 우리 시대 27인의 이야기   2
 끄로마뇽
2862 2013-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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