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현실] 1장

2009-04-23 11:17:11, Hit : 5026

작성자 : 박상훈
1장. 한국 지역주의의 기원과 구조

1. 몇 가지 기초적 논의
오늘날처럼 영남이나 호남이니 하는, 지역을 둘러싼 갈등의 구조는 언제,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을까? 그때의 지역주의는 대체 어떤 내용을 갖는 것인가? 옛날부터 있었다는 ‘지역색’, ‘지역정서’, ‘지역감정’이 계속해서 이어져 온 결과인가, 아니면 근대이후 사회변화의 과정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것인가?
1970년대 중후반에 이루어진 고흥화․김현섭(1976), 김진국(1977)의 조사연구는 좋은 출발점을 제공한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연구는 객관적으로 검증가능한 자료와 방법에 의존하여 출신 지역을 둘러싼 사회문화적 갈등의 내용을 조사 분석한 최초의 연구 성과이기 때문이다.
고흥화․김현섭(1976)에 따르면, 이 시기 60%에 가까운 피조사자가 결혼, 친구, 동업관계에서 호남출신을 기피대상으로 꼽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호남 이외의 지역출신에 대한 기피의식은 평균 10%미만에 불과하다. 김진국(1977)의 조사 역시 호남 이외 지역 출신 모두가 호남출신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적어도 1970년대 중후반 시점에 호남출신에 대한 기피의식이 다른 지역출신에 대한 기피의식과 분명히 구별될 정도로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일단은 이를 ‘반호남 지역주의’로 정의하기로 하자. 그렇다면 비호남 출신은 어떤 근거로 호남 출신을 기피하였고, 반대로 호남 출신은 지역차별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다시 이들의 조사에 따르면, 비호남출신이 호남출신을 사회적 관계의 대상에서 배제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근거는 주관적 편견을 내용으로 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비호남출신이 호남출신을 기피하는 이유는 호남지역이 갖는 정치경제적 특성이나 호남출신이 주로 담당하는 사회적 기능과 같은 요인들에 의해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호남출신은 ‘간사하다’, ‘신뢰성이 없다’, ‘이기적이다’, ‘뒤끝이 나쁘다’와 같이 객관적으로 검증이 불가능한 개성적 특질 내지 행동양식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라도 사람’에 대한 개인적 경험을 과장하는 경우가 많았고, 호남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옛날부터 늘 있었다는 식으로 그 기피의식을 정당화하려 한다. 이에 반해 호남출신의 대부분은 자신들이 갖는 소외감의 근거를 지역간 경제적 격차, 특정 지역에 대한 인사상의 차별 등 권위주의 통치의 결과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요컨대 지역차별과 관련해, 호남 출신의 경우 ‘사회구조적 차별’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는 점에서 ‘체제’와 비판적으로 마주하고 있는 반면, 비호남 출신의 경우 호남 사람의 타고난 부정적 특질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는 점에서 ‘가해자 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김진국 1988, 236).
한국의 지역주의를 반호남 지역주의로 정의하는 것은 분명 우리사회의 지배적 관점과 대립한다. 앞서 지적했듯이 지역주의에 대한 우리사회의 지배적 관점은 지역주의 문제를 영호남 갈등 혹은 이들 간의 지역감정 대립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1977년 자료를 이용해 김진국(1984)은 지역민 상호간의 호오태도를 100점 척도로 계산하였는데, 그 결과는 매우 흥미롭다. 지역주의 문제를 영호남 지역감정으로 이해한다면 지역민 상호간 호오태도에 있어 영호남 간의 거리가 크게 나타났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전혀 달랐다. 우선 호남 출신이 가장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 지역민은 영남출신이었다. 역으로 호남 출신에 대해 가장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 지역민은 서울과 충청 출신으로 나타났다. 호남 출신에 대해 가장 덜 기피한 것은 영남 출신이었다. 이는 1970년대 중후반의 시점에서 볼 때 한국의 지역주의는 영호남 지역감정의 대립으로 정의될 수 없는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호남출신에 대해 비호남 출신 전반의 사회적 거리감이 크게 나타났지만, 그 중에서 영호남 출신 간의 거리감은 가장 작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적어도 1970년대 중후반까지 영호남 사이의 거리감이 작았다는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가능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하고, 우선 문제를 큰 차원에서 제기해보자. 압축적 근대화의 정점이 달하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는 1970년대 중후반의 시기에 어떻게 출신 지역과 같은 귀속주의적인 기준을 경계로 주관적 편견에 바탕을 둔 반호남의 지역주의가 부각될 수 있었을까? 시기적으로 그 기원을 어느 시점에서 찾을 수 있을까? 전통사회에서부터 있었던 ‘전근대적인 것’의 연장인가 아니면 냉전반공주의 체제하에서의 권위주의 산업화로 요약될 수 있는 한국적 근대화의 특수성 때문에 만들어진 ‘근대적인 것’인가?

2. 지역주의 문제의 역사적 기원
지역주의의 역사적 기원을 근대 이전에서 찾는 입장은 크게 두 견해로 나눠진다. 첫 번째 견해는 전통적으로 존재했던 지역주의가 1960-70년대의 ‘근대화에도 불구하고’ 잔존하였던 것으로 보는 주장이다. 두 번째 견해는 고대 국가 시기부터 강한 반호남주의가 존재했고 바로 이 ‘반호남지역주의 때문에’ 한국의 근대화가 호남에 대한 경제적 차별, 엘리트 충원에서의 차별을 동반했다는 주장이다.
첫 번째 견해는 한마디로 근대화론에 따른 이해방법이라 할 수 있다. 근대화론이 기초하고 있는 ‘확산모델’에 따르면, 근대화의 충격은 귀속주의적이고 지방주의적인 가치와 일차적 유대를 특징으로 하는 전통사회를 근대적 사회분화와 그에 상응하여 성취주의적이고 보편주의적인 가치와 합리적 유대가 지배하는 사회로의 변화시키는 효과를 갖는다. 이때 지역주의는 ‘전근대적인 것’ 혹은 근대화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전근대적 유산’의 하나로 정의되고, 근대적 사회발전과 정치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비판된다(이영일 1971; 송복 1989; 홍동식 1991). 두 번째 견해는 근대화론과는 정반대의 ‘시원주의적 접근’으로 개념화할 수 있다. 이는 오랜 역사적 기원을 갖는 ‘반호남 지역주의 때문에’ 영남에 지역기반을 둔 권위주의 정권이 근대화를 추진하게 되었을 때, 경제개발과 엘리트 충원 과정에서 영남의 혜택과 호남의 차별을 낳았다고 보는 것이다. 근대 이전의 오랜 역사를 통해 지역주의는 사회구성원들의 내면세계를 지배해왔다는 것이다(김만흠 1991, 신복룡 1990, 남영신 1991;1992).
관점은 다르지만 두 견해 모두 지역주의를 근대 이전의 전통사회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지역주의는 근대 이전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전통사회의 지역주의와 앞서 살펴본 1970년대 중반의 지역주의는 같은 성격을 갖는 것이었을까? 경험적 테스트를 위해 기존 연구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설명 요소들을 분리해보자.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반호남의 지역주의는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대립 그리고 백제의 멸망과 통일신라의 등장에 최초의 기원을 둔다. 둘째 후백제와의 치열한 군사적 대립을 통해 창건된 고려에 이르러 후백제 출신은 지배층의 구성에서 배제되었다. 셋째, 농업에 기반을 둔 조선시대 호남지역은 가혹한 수취의 대상이었음으로 잦은 민란과 모반이 일어났고 그 결과 영남 출신이 중심이 된 지배층에 의해 차별받았다. 넷째, 반호남지역주의는 옛부터 사회구성원들의 의식구조에 깊이 자리잡고 면면이 이어져왔다.
삼국시대와 관련하여 ‘백제=호남’의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백제를 세운 온조(溫祚)는 부여족의 일파로서 고구려로부터 남하하여 내려온 이주민 세력이었다. 그리고 백제가 존립했던 678년의 기간 중 493년 동안 정치적 중심지는 오늘날의 서울과 경기지역이었고 나머지 185년 동안은 오늘날의 충청도 공주와 부여였으며 그 아래 호남지역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고려시대에서도 호남 출신이 지배층의 구성에서 차별되거나 배제된 증거도 찾을 수 없다.
고려 전기 지배층의 배출지역을 보면 후백제지역 출신(31성관)과 신라지역 출신(27성관)이 비슷한 수준을 보이고 있으며, 왕비의 배출지역 역시 지역적으로 고르게 편재되었다. 특히 고려 말 몽고 침략에 대항하는 장기간의 항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고대국가로의 회귀경향은 사라졌고, 그 뒤 지난 천년 동안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농업에 기반한 중앙집권적 관료사회로 특징되는 조선시대와 관련하여 호남지역이 특별히 가혹한 수취의 대상이 되거나 이로 인해 민란이 자주 발생하였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경작 가능한 토지의 크기나 단위당 수확량을 넘어서 특별히 호남의 과다수취를 보여주는 증거는 없다. 민란의 발생빈도는 호남이 많은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영남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남영신 1991). 조선시대 중앙관료의 출신지 역시 호남이 특별히 차별되지 않았다. 만약 조선 시기 특정 지방 혹은 그 출신에 대한 ‘법제화된 차별’이 존재했다면 그것은 호남이 아니라 서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조선 전기에 있어서 서북출신의 경우 당상관이라는 중앙의 고급관리에는 단 한 사람도 임용되지 않았고, 후기에 와서도 지방관에 한해서 몇 사람의 예외만 있었을 뿐이었다. 이와 같은 중앙정부의 차별 때문에 임진왜란 때는 경기 이남에서 많은 의병이 있었던 것과 달리 이 지역에서는 의병이 없었을 뿐 아니라, 거꾸로 피난 온 왕자나 대신을 잡아 왜군에게 넘겨주기까지 했다(이이화 1983, 121-123).
특정 지역에 대한 편견이 근대 이전부터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체계 속에 깊이 뿌리내려 있었고 지속적으로 재생산되어 근대 이후에 표출되었다고 보는 것은 일종의 시대착오적 오류이다. 무엇보다도 위계적 신분사회와 전통적 농업사회로 규정될 수 있는 전근대적 사회체계는 자율적 의식체계를 기능적 필수요인으로 하지 않는다(Gellner, 1987). 혈통이라고 하는 귀속주의적인 기준에 의해 절대다수의 사회구성원의 사회적 삶이 결정되었던 전통적 신분사회에서 집단적 정체성을 둘러 싼 갈등이 나타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오페·비센탈(Offe & Wissenthal, 1980)이 집단적 정체성을 위한 갈등을 매우 근대적인 현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다른 한편 절대다수의 사회구성원을 토지에 결속시키는 전통적인 농업사회는 그 공간적 한계를 넘는 이동의 필요성을 갖지 않으며, 대부분의 사회구성원들에게 공간적 이동을 허용하지도 않는 사회이다. 그것은 대다수 생산 집단의 생활세계에서 여타 지역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요구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통치적 필요나 지배층 내 권력투쟁의 계기로 인해 특정 지역에 대한 편견이 부과되었다하더라도 그것이 의식되고 재생산되는 것은 지배층 내부에 한정되었을 뿐 절대다수를 이루었던 생산자 집단의 의식구조에 침투하여 자연적으로 계승될 수 있는 토대를 갖지 않는다.
물론 근대 국민국가로의 이행이 서구의 경로와 같이 지역적으로 분리되어 산재해 있던 다수의 문화공동체들을 강제로 통합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면, 그 이전에는 의식적인 계기에 의해 통합되지 않았던 지역공동체에 대해 정치적인 충성심과 문화적인 정체성을 재발견하고 동원하려는 경향이 만들어질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는 그러한 지역공동체가 존재하지 않는 ‘역사적 민족’을 오랫동안 유지해왔으며, 전통적 사회구조의 해체가 외부의 제국주의 국가에 의해 강제적으로 이루어졌으므로 내부의 여러 지역공동체로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정체성을 귀속시키려는 경향이 나타날 여지는 없었다. 실제로도 근대로의 전환기라 할 수 있는 조선 후기나 일제 식민시대 동안 지역이라는 단위와 민족이라는 단위의 경쟁과 갈등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비교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오히려 약한 지역성이야말로 한국사의 중요한 특징으로 부각된다.  
그렇다면 앞서 살펴보았듯이 1970년대 중반의 시점에서 부정적 지역편견이 호남에 집중되면서 전라도 사람은 ‘잘 속이고’, ‘배신을 잘 한다’는 등의 편견이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인식이라는 주장이 사실처럼 받아들여졌던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근대 이후 여러 사회에서 ‘전통’이라고 주장되는 의식과 행태가 대개는 “정치경제적 필요 때문에” 작위적으로 발명,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분석하면서 홉스봄(Hobsbawm, 1983, 2)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이들 ‘창조된’ 전통의 특이성은 .....역사적인 과거와의 연속성이 대체로 인위적이라는 점이다. 간단히 말해서 창조된 전통들은 과거의 맥락과 형태적으로 관련성을 가지면서 새로운 상황에 반응한 것들이다. 창조된 전통이 띠고 있는 그 나름의 과거를 거의 강제적으로 반복시킴으로써 그 전통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지역주의와 관련해 이야기되고 있는 전통적 인식 역시 마찬가지의 특징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분명 반호남지역주의의 기원을 근대 이전에서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근대적인 것이고 새로운 것이다. ‘충의지향’, ‘고국의 풍토를 가진 지역’ 등과 같이 호남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나 정철이나 윤선도와 같이 호남을 칭송했던 내용들은 배제되고, 근대 이전의 중앙과 지방의 균열을 반영하는 각 지방에 대한 부정적 인식 중에서 오로지 호남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만이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호남에 대한 옛부터 내려오는 전통적 인식이란 것은 새롭게 ‘불러들여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분석해야 할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 된다. 호남인이 ‘본래 갖고 있는 특질’을 이유로 인간적 관계에서 차별과 배제의 대상으로 삼는 지역 편견은 언제, 어떤 사회적 계기에 의해, 누가 발견하고 만들었을까?
해방이후 1950년대를 통해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지역적 고정관념은 비단 호남만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서울 깍쟁이’, ‘영남 문둥이’, ‘호남 개땅쇠’, ‘함경도 이전투우’, ‘강원도 감자바위’ 등은 이 시기에 나타난 대표적인 고정관념 내지 편견들이다. 당시 이러한 고정관념과 편견들은 주로 서울에서 나타난 것이었는데, 이는 신분적 구조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귀속적으로 주어지고 도보로 도달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지리적 공간의 존재가 문제시되기 어려웠던 전통사회에서와는 달리, 도시로의 이주에 의해 지역성의 차이가 부각되고 여기에서 집단적 정체성은 사투리와 지연관계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던 초기 근대사회의 특징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 시기 부정적 편견의 집중적인 대상이 된 것은 서울로의 이주가 많았던 지역민들이었다.
북한지역으로부터 내려온 이주민과 그 중에서도 하층민을 이루고 있는 함경도 출신이 대표적인 예였고, 반대로 서울 토박이의 인색함에 대한 이주민들의 부정적 편견도 컸다. 1955년 6월 6일자「중앙학보」에 게재된 글에서는 함경도 출신을 “이전투우(泥田鬪牛)”적 특질을 가진 사람들로 묘사하고 있고, “그 자식 함경도 자식인데 더 말해서 뭐해!”라는 편견이 매우 강하게 나타났음을 보여준다. 같은 해 10월 22일자를 보면 “내가 시골에서 듣기엔 서울사람들은 아주 인정있고 얌전하고 궁한 사람을 도울 줄 .... (안다)던데 웬걸 내가 와서 겪어보니 인정있고 얌전은 고사하고 궁한 사람의 입속 것을 내어먹을랴 하니 어찌된 일인지 어리벙벙하다”라며 서울 토박이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나타난다. 1960년 조사된 이진숙(1960)의 연구는 서울사람에 대해 피응답자의 40% 이상이 ‘인색하다’고 평가하였으며, 30% 이상은 ‘간사하다’는 고정관념을 부여했음을 보여준다. 적어도 1960년대 초반까지 호남이 지역과 관련된 부정적 편견을 집약시킨 대상은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한국에서 반호남 지역주의를 자극하는 대표적인 정치인으로 알려진 김대중은 1961년 당시 강원도 지역의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자신의 고향인 경북에서 61%를 득표했으며, 전북과 전남에서도 각각 54%, 62%를 득표했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적어도 다음 두 가지 사실은 분명해졌다. 하나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1970년대 중반의 시점에서 반호남 지역주의가 주목되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근대화 혹은 도시화 과정에서 이주민들 사이에 지역적 정체성을 둘러싼 편견의 교환이 본격화되었지만 적어도 1960년대 초까지는 호남출신을 중심으로 한 배제와 소외의 갈등구조가 존재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결국 문제의 반호남주의는 1960-70년대의 권위주의 산업화와 그것이 가져온 사회변화의 맥락에서 부각된 것으로 접근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3. 권위주의 산업화의 공간적 특성과 지역주의
잘 알다시피 한국의 근대적 사회변화가 집중되었던 1960-70년대 경제개발 혜택과 엘리트충원의 지역적 분배에서 수도권과 영남은 집중적인 혜택을 받았다. 비단 호남만이 아니라 그 밖의 지역 모두가 산업화와 엘리트충원에서 혜택을 받지 못했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첫째는 왜 영남이 아니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즉 수도권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 비해 영남이 경제개발과 엘리트충원에서 압도적인 수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역균열의 분획선은 왜 수혜지역으로서의 영남과 비수혜지역으로서의 비영남의 갈등으로 나타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둘째는 왜 호남이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즉 경제개발과 엘리트충원에서 호남과 마찬가지로 혜택을 받지 못한 충청권과 강원도 출신 역시 왜 반호남의 편견에 쉽게 반응하였는가? 혹은 해방이후 1950년대를 거치는 동안 경쟁적으로 형성되었던 각 지방에 대한 부정적 고정관념과 편견 중 호남에 대한 부정적 편견만 호명되고 확대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라디오, TV, 신문 등 대중매체가 생활세계를 지배하기 전인 70년대 중반까지 집단 간 상호의식이 형성되는 소통구조의 기술적 조건은 직접적인 접촉에 의해 압도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문제로 삼는 지역 혹은 지역성이란 차이가 만나는 지점은 각 지역 출신자들이 모여 있는 도시에서 이루어졌다. 지역과 관련된 편견은 지방이 아니라 중심과 도시에서 만들어졌고, 이것이 지방으로 확대되는 구조였던 것이다. 박정희 시기 지역성의 차이가 교차했던 도시는 급격히 성장하는 산업도시였다. 따라서 이 시기 나타난 지역주의는 산업화, 도시화, 계급분화라는 시간적 축과 지역성이라는 공간적 축이 교직되는 지점에서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1960-80년 사이 35개시의 인구증가분의 50% 이상은 타지역으로부터의 이주에 의한 것이었다. 도시로의 이주는 여러 가지 요인에 따른 것이었다. 행정체계의 정비에 따른 도시의 인구 흡수능력, 교육기회를 얻고자 하는 요인에 의한 이주의 대부분은 같은 광역 행정지역 안에 있는 농촌에서 도시로의 이주로 채워짐으로써, 지역이라는 정체성이 대비되거나 갈등의 소재가 되기는 어려웠다. 반면 다른 광역 지역으로의 이주의 대부분은 토지로부터의 퇴출된 인구를 흡수할 수 있는 산업부문의 유인요인에 의한 것이었다. 1960년대 산업생산의 중심지였던 서울과 인천의 인구증가 요인을 보면 타지역으로부터의 인구이동이 기여한 정도가 각각 70%와 114%에 이른다. 1970년대 새로운 산업도시로 등장한 부천, 안양, 울산, 포항의 경우는 각각 83%, 73%, 69%, 69%에 이른다(전광희 1990, 118-119).
박정희 시대 산업도시로의 이주는 두 개의 거점지역을 중심으로 하였다. 하나는 서울-경인지역이었고 다른 하나는 영남지역이었다. 그러나 영남지역의 경우 산업도시로의 인구이동은 주로 영남지역의 농촌퇴출인구로 채워짐으로써 지역성의 교차정도는 경인지역에 비해 훨씬 작은 것이었다. 따라서 박정희 시대 지역의 차이에 기인하는 갈등은 주로 경인지역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서울 외곽의 경인지역이 개발되기 이전인 1960년대의 경우 절대적인 수의 인구유입을 유인한 지역은 서울이었다.
서울로 유입된 지역민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은 호남과 충청이었다. 서울로 이주한 호남권과 충청권의 인구는 주로 저임금의 불안정 취업자나 일용직 혹은 비공식부문에 종사하는 산업예비군으로 편입되었다. 1979년 저소득층의 출신지역별 분포에 대한 서울시의 조사를 보면 호남이 28.3%로 가장 많고 그 다음 충청이 17.3%, 서울이 14.2%, 뒤이어 영남은 12.5%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김만흠 1991 72). 1980년 기준으로 충청권, 호남권, 영남권의 인구비가 11.7 : 16.2 : 30.5인 것을 기준으로 보면 충청권과 호남권이 인구비중을 넘는 하층이동이 두드러지는 반면, 영남권의 서울로의 하층이동은 인구비중을 훨씬 못 미친다는 사실이 특징적이다. 영남의 경우 농촌퇴출인구의 대부분은 영남지역의 산업 도시에서 흡수했으며, 서울로 이주한 영남출신의 상당부분은 대학진학, 관료진출, 사업의 형태를 띤 엘리트나 중산층으로의 이주였기 때문이다.
당시 저소득층이 밀집해 있는 서울의 빈민가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공장에 다니는 불안정한 저임금노동자, 일용직 노동자, 전통적 상업과 서비스부문 종사자, 그 밖의 다수의 실업상태에 있는 빈민 등 공식부문과 비공식부문을 유동하는 인구가 뒤섞여 경쟁하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은 타지역으로부터 이주한 지 오래되지 않은 사람들로서 각자의 사회적 관계와 정체성이 출신지역으로 분리되는 경향을 강하게 띠었다. 이때 도시의 저소득층 이주자들 사이에 호남 출신이 다수를 점한다는 사실과, 이들이 피고용자이나 피수혜자의 위치에 설 가능성이 높았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효과를 발휘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실은 도시에서의 정착과 고용을 위해 서로 경쟁해야 하는 이주민들 사이에서 비호남출신들의 반호남 의식을 자극하는 객관적 기초였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피고용자와의 갈등에서 고용주가 그 원인을 호남의 지역성으로 치환시키는 것을 용이하게 했기 때문이다.
산업화의 초기단계이자 급격한 도시화의 물결 속에 있었던 당시로서는 두 번째 측면보다 첫 번째 측면이 보다 중요한 계기였다고 할 수 있다. 도시의 과잉인구를 구성하고 있는 이들 하층계급들 사이에 정착과 고용을 둘러 싼 생존경쟁이 훨씬 강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서 살펴 본 김진국(1984)의 조사에서 나타나듯 호남에 대한 배타적 거리감은 하층계급의 최다수를 차지하는 호남출신과 규모면에서 그 뒤를 잇는 충청 출신 이주민, 그리고 서울의 토박이 하층민 사이의 경쟁적 관계에서 기인하는 바 컸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이상과 같은 사회적 계기와 작인에 의해 형성된 반호남주의는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갖는 것이었을까? 객관적인 증거로서 말할 수는 없지만 이주민이 집중되었던 서울에서 호남에 대한 부정적 고정관념이 점차적으로 편견과 기피의식으로 발전했을 것이라는 가정은 현실성이 있다. 동시에 이 과정에서 이북 출신과 같이 호남 이외에 대한 부정적 고정관념은 더 이상 확대되지 않거나 점차 약해졌을 것이라는 것도 합리적인 가정이다. 그러나 1970년대 이전까지 반호남 편견과 기피의식이 집단적 갈등이나 정치 경쟁을 자극한 사례를 찾기는 힘들다. 반호남주의가 집단적 갈등과 정치적 경쟁의 소재로 불러내지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들어서였다. 1971년 대선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시기 반호남주의의 정치적 호명과 조직화는 어떤 계기와 작인에 의해 이루어졌을까? 그리고 그 효과는 어떻게 나타났을까?

4. 지역주의의 정치적 동원과 편견의 조직화

지역주의가 위로부터 조직되고 동원되었다는 증거를 확인하기에 가장 용이한 사례는 선거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선거는 제도화된 정치참여가 제한되어 있던 권위주의체제에서 정치적 동원이 가장 급격하게 이루어지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 시기 반호남 지역주의가 최초로 동원된 사례는 1971년 대통령 선거였지만 그 이전 1960년대에도 선거에 동원된 지역성의 사례가 있었다.
1960년대 선거에 동원된 지역성은 호남이 아니라 영남이었다. 1970년대 이전 영남의 지역성이 정치적으로 동원된 이유는 영남이 전체 인구의 30%를 상회하는 인구구성을 갖고 있다는 점과 박정희후보가 영남출신이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예컨대 1963년의 대통령 선거과정에서 박정희 후보는, 영남이외의 지역에서 ‘구악일소’ 등 개혁주의를 강조한 반면 영남 지역에서는 영남의 지역성에 호소하는 차별화전략을 구사하였다. 1967년 선거의 경우 역시 전체적으로 경제발전의 성과를 부각시키면서도 영남지역의 선거유세에서는 계속해서 영남의 지역성을 동원하고자 하였다. 영남의 지역성에 호소하는 선거전략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1963년 대선의 경우 박정희 후보는 전국 평균 51%의 지지를 획득했지만 경북과 경남에서는 각각 61%와 67%를 획득했다. 1967년 대선의 경우는 전국 평균득표 55%에 비해 경북과 경남에서는 71%와 75%를 획득하였다.
이처럼 영남지역의 유권자가 박정희를 지지한 것은 산업화의 혜택이 이 지역에 집중되었다는 사실로부터 기인한다. 예를 들어 1963년의 시점에서 경남의 일인당 지역주민소득(GRP)은 전국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 경북 역시 전북에 비해 13%가 낮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1963년 이후 영남의 경제수준은 놀라운 속도로 성장하여 1970년의 시점에서 영남은 충청과 호남을 크게 앞질러 경기에 버금가는 일인당 주민소득을 보였다. 따라서 영남 유권자의 박정희 지지는 산업화의 혜택을 대가로 권위주의를 감수하는 일종의 '정치적 교환(political exchange)'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1960년대 선거와는 달리 1971년 선거의 경우 반호남주의의 동원이 필요했을까? 쉽게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일 것이다. 첫째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사적인 영역에서 반호남 지역편견이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1971년의 선거에서 박정희의 경쟁후보는 호남출신의 김대중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두 사실은 1960년대 박정희의 경쟁후보가 충남출신의 윤보선이었으며 충남의 경우 지역편견의 대상으로 부각되지 않았다는 것과는 대비되는 변화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박정희 정권이 반호남지역주의를 조직하고 동원하는 데 있어 일종의 필요조건이었을 뿐, 인과관계를 연결해주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는 못한다. 보다 중요한 사실은, 김대중이 호남출신이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의 도전과 영향력이 매우 강력했다는 사실에 있다.
1971년 선거에서 김대중이 선거과정을 압도하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첫째 1970년을 전후하여 권위주의체제에 대한 사회적 비판과 산업화와 경제성장의 비용을 감수했던 사회집단들의 저항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는 점이다. 1969년 3선개헌에 대한 비판적 분위기를 바탕으로 재야라고 불리는 비판적 사회세력이 등장한 것도, 학생운동이 반독재의 슬로건을 내걸고 사회의 전면에 나선 것도 이 시기이다. 또한 ‘전태일 분신사건’, ‘광주대단지 사건’ 등 산업화가 만들어낸 하층계급의 저항이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도 이때였다. 둘째 김대중 후보가 권위주의 체제를 뒷받침한 제도와 기구, 이 시기 산업화가 낳은 불균등한 분배구조를 정면으로 공격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당시 그는 중앙정보부의 수사기능을 축소시키고 법부무로 이관함으로써 국회의 심의대상으로 만들겠다고 공약했는가 하면, 1968년 창설된 향토예비군제를 폐지하겠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또한 적대적 남북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4대국보장안’을 제시하였고 ‘대중경제’라는 새로운 경제운영원리를 주창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박정희 정권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야당의 대통령후보로 나선 김대중이 박정희 정권의 권위주의적 근간을 공격하고 나섰을 때 그의 대중적 영향력은 폭발적인 양상으로 나타났다. 4월 18일 김대중의 장충단공원 유세에서 수십만의 군중이 모인 것은 박정희 정권뿐만 아니라 야당 스스로도 놀라게 하였을 정도이다. 이 시기 권위주의 정권이 갖는 위기감을 보여주는 증거는 많다. 예컨대 당시 집권당이 사용한 선거자금이 1971년 국가예산(5천2백억원)의 10%를 상회하는 600억원에 달했다거나, 선거 유세 종반에 박정희 후보의 ‘이번이 마지막’이란 호소는 대표적인 예이다. 당시 중앙정보부의 고위관리의 증언을 바탕으로 김충식(1992, 315-318)은 ‘이번이 마지막’이란 호소는 김대중 후보의 상승세가 예상외로 강력하고 이에 따라 박정희 후보의 당선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을 감지한 중앙정보부의 ‘작품’으로 설명한다. 중앙정보부는 이 과정에서 공화당의 지도부를 설득하고 마지막으로 박정희와 막역한 관계를 갖는 인사를 내세워 박정희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1972년 유신체제의 등장은 이런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위기상황에 직면하여 박정희 정권이 조직한 반호남지역주의의 의미구조는 어떻게 나타났는가? 물론 선거국면에서 박정희 정권이 조직한 반호남지역주의는 김대중이 호남출신이라는 사실을 중심으로 한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김대중이 반호남지역주의의 의미구조를 구성하는 데 있어 중심적 계기가 됨으로써 이질적인 요소들의 접합이 가능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반호남주의와 반공주의의 접합이자, 반호남주의를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영역으로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반호남주의와 김대중과의 의미연관을 위해 동원된 언술이 ‘호남 대통령’이었다면 반공주의와 김대중과의 의미연관을 위해 동원된 언술은 ‘사상이 의심스런 자’라는 언술이었다. 박정희 후보측이 제기한 “이런 사람이 호남 대통령은 될 수 있지만 어떻게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수 있느냐”는 주장과, 예비군제폐지를 둘러 싼 ‘안보논쟁’에서 그를 ‘이적행위자’로 몰아부친 것 등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당시 국방장관은 “예비군폐지는 김일성의 남침을 촉진 유도하는 이적행위다”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며 김대중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김대중을 호남대통령으로 호명하는 것만으로 반김대중의 정치동원에 반호남주의가 효과를 갖기는 어려웠다. 왜냐하면 1960년대를 거치면서 형성, 확산되었던 ‘간사하고 앞뒤가 달라 배신을 잘하는 호남사람’이란 지역편견은 개인들 간의 사적인 관계영역에서 작용하는 것이었을 뿐 집단적인 갈등이나 정치경쟁의 분획선으로 작용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1971년 선거에서 ‘자기들끼리만 똘똘 뭉치는 호남 사람’이란 고정관념이 등장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예컨대 “야당후보가 이번 선거를 백제, 신라의 싸움이라고 해서 호남 사람들이 똘똘 뭉쳤으니, 우리도 똘똘 뭉치자”는 주장이나, “호남인이여 단결하라”라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내용의 전단이 영남지역에 뿌려진 것 등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똘똘 뭉친 호남’이란 고정관념을 조직화한 것은 반사적으로 다른 지역민의 반호남주의를 결집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도는 박정희의 영남지역 유세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났다. “영남 대통령을 뽑지 않으면 우리 영남인은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된다”거나 “쌀밥에 뉘가 섞이듯 영남도에서 반대표가 나오면 안된다. 영남 사람 쳐놓고 박대통령 안찍는 자는 미친 x이다”는 주장, 그리고 “우리 지역이 단합하여 몰표를 몰아주지 않으면 저편에서 쏟아져나올 상대방의 몰표를 당해낼 수 없다”는 등의 주장 등은, ‘호남이 똘똘 뭉쳐 호남대통령을 만들려고 하는데’라는 의미구조에 의해 뒷받침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시기 조직되고 정치적으로 동원된 반호남주의에 당시 사회구성원들은 어느 정도 반응했을까? 이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은 어렵겠지만 아마도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은 분명할 것이다. 첫째는 당시의 권위주의 지배블럭의 경우 박정희 정권이 동원한 반호남주의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응하였을 것이다. 상층계급이나 급격한 산업화의 수혜집단 그리고 엘리트 충원과정에서 특혜를 얻은 이들 지배블럭 구성원들에게 있어서 권위주의체제의 위기와 불안은 곧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위기와 불안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의 경우 반호남주의의 동원에 반응하였을 뿐 아니라, 반호남주의의 적극적인 조직자, 동원자가 되었을 거라고 예상할 수 있다. 둘째 정권과 지배블럭이 동원한 반호남주의에 대해 일반대중이 보인 반응은 그다지 강렬한 것은 아니었다. 김대중을 호남대통령으로 상징화하려했지만 이 보다는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투쟁적인 야당후보라는 이미지가 더욱 강하게 작용했다. 또한 영남과 그 출신이 경제개발과 인사충원에서 독점적 수혜를 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비판도 강했다. 김대중은 지역개발의 불균형은 박정희 정권의 책임이라고 공격했고, “내가 당선되면 나는 자유와 정의를 사랑하는 모든 국민의 대통령이 되는 것이지, 결코 어느 지역을 대표하는 대통령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며 “호남 사람이라서 못 찍어주겠다고 생각하면 안 찍어도 좋다”고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똘똘 뭉친 호남인’이란 조작된 이미지를 이용해 비호남 유권자의 반호남주의를 자극하고자 했지만, 그에 상응하는 호남의 집단적이고 강렬한 움직임은 없었다. 따라서 김대중을 ‘호남대통령’으로 호명했던 것이 야당지지성향을 가진 도시의 유권자들을 김대중으로부터 분리시키지 못했고, ‘똘똘 뭉친 호남’에 대한 반사적 반호남주의가 부각되지 않았다. 아래의 표는 1967년 선거와 1971년 선거에서 여야의 두 후보가 얻은 지역별 득표비를 보여주고 있다.

<표 2> 여-야 대통령 후보의 지역별 득표비 (단위: %)
서울경기강원충북충남전북전남부산경북경남제주전국67년 대선
(박정희:윤보선)47 : 5344 : 5655 : 4552 : 4849 : 5146 : 5449 : 5167 : 3371 : 2975 : 2564 : 3655 : 4571년 대선
(박정희:김대중)40 : 6050 : 5061 : 3958 : 4255 : 4537 : 6335 : 6556 : 4476 : 2474 : 2658 : 4254 : 46


아마도 1971년 선거가 반호남 지역주의에 의해 압도되었다면 적어도 영남지역의 경우 그 이전 대통령 선거보다 박정희 지지가 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상과는 달리 박정희의 득표는 경남에서 오히려 줄었으며 부산은 매우 많이 줄어들어 김대중의 전국 평균득표비에 가까운 정도였다. 영호남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의 득표결과만 보면 야성이 강한 도시지역 특히 서울에서의 지지에 힘입어 김대중이 1만 7천여 표를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이 시기에 국한해 본다면 정치적으로 동원된 반호남주의는 대체로 위로부터의 현상에 국한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혹은 박정희 정권과 지배블럭에 의해 조직된 반공주의와 반호남주의의 접합은 여전히 불완전한 것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1971년 선거에서 가까스로 정권재창출에 성공한 박정희 정권은 유신체제로의 전환을 통해 정치경쟁을 극도로 제한시켰다. 그러나 잠재적 경쟁자이자 반독재투쟁을 자극하는 김대중의 존재는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따라서 1971년 선거 이후에도 박정희 정권과 권위주의체제의 수혜자들이 반김대중과 반호남의 이미지와 편견을 지속적으로 확대시키고자 했다는 것은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다. 정권은 김대중에 대한 좌경이미지를 부각시키고자 노력했다. 사적 관계영역에서 반호남, 반김대중의 이미지와 편견의 조직자는 지배적인 위치에 있던 권위주의체제의 수혜자들이었을 것이다. 1971년 선거를 전후해 이들이 경험한 반독재투쟁과 하층계급의 저항에 대한 불안감은 반김대중 혹은 반호남과 직접적인 의미연관을 갖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신체제하에서 반호남주의는 ‘지배’와 ‘통치’를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조직되고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추정해볼 수 있다. 그 전형적인 사례는 1980년 광주항쟁 시기에 나타났다.
비슷한 시기에 있었고, 동일한 반독재 민주화의 열망이 표출된 사례였던 부마항쟁에 대한 해석과는 달리, 유독 광주항쟁에 대해서는 호남의 지역정서를 불러들여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과격세력’과 ‘폭도’가 주도했고 소외의식과 ‘한’을 가진 지역민이 이에 동조했다는 정부와 언론의 설명은 반공주의와 반호남지역주의의 접합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의미구조를 가졌다. “상당수의 타지역 불순인물 및 고정간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하여 ..... 계획적으로 지역감정을 자극, 선동하고 난동행위를 선도한데 기인한 것”이라는 정부의 발표나 400대 가까이 파손된 차량 가운데 유독 경상번호판을 단 2대만을 부각시키는 등 이미지를 통해 지역감정을 동원하려했던 언론의 보도태도는 대표적이다. 이러한 해석이 작위적으로 동원되었을 때 권위주의 체제의 수혜자들의 수용적 태도를 예측해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을 지역주의 때문으로 치환하려는 이들의 해석이 큰 효과를 가졌다고는 볼 수 없다. 광주에서의 비극을 낳으면 집권했던 5공화국이 반호남 지역주의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추구했지만 반권위주의 저항연합의 전국적 확대를 막지는 못했다. 지역주의가 사회적 갈등의 분획선이나, 정치갈등의 분획선으로 기능한 사례도 없다. 반호남주의가 권위주의 정권이나 지배블럭에 의해 광범하게 조직화되고 동원되었으며, 반공이데올로기와의 접합의 시도가 계속되었지만 그것은 여전히 지배의 욕구를 공유하는 집단 사이의 문제였을 뿐, 사회 대다수의 의식세계를 지배하는 정도의 효과를 가졌던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1980년대 이후, 특히 1987년 민주화이행기에서는 어떠했을까? 이 문제는 다음 장에서 살펴보고 일단은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보자.

5. 2차적 균열로서의 한국 지역주의
이상의 논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박정희 정권 시기를 거치면서 형성된 지역주의는 사회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관계형성에서 비호남출신의 인격적 특질 운운하는 편견에 기초하여 호남출신을 기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둘째, 이러한 반호남의 지역주의는 박정희 정권 시기에서의 급격한 근대화추진에도 ‘불구하고’ 잔존한 전근대적인 유산이 아니라, 지역적 정체성의 차이가 중첩되었던 급격한 도시화와 계급분화 그리고 영남의 지지를 바탕으로 정권을 재생산하고자 했던 권위주의 산업화의 정치경제적 성격 ‘때문에’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셋째, 이 과정에서 근대 이전의 중앙과 지방의 균열을 반영하는 호남에 대한 편견은 ‘발견’되었고, ‘동원’되었으며 오랜 역사적 기원을 갖는 것으로 ‘창조’되었다.
반호남지역주의는 호남이라는 지역적 특성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는 이를 ‘2차적 균열’혹은 냉전반공주의의 기초위에서 이루어진 권위주의 산업화가 만들어낸 ‘파생적 균열’로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언어, 종교, 인종, 문화, 전통, 역사적 차이를 가진 다수의 지역공동체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근대국민국가를 형성한 나라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경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유형의 지역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들 나라들의 경우 지역주의는 근대 이전에 역사적 기원을 갖는 원형적 지역성(proto-regionalities)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다른 지역집단과 객관적으로 구분되는 문화적 특성을 갖는다. 그 표출형태는 전통과 문화적 정체성에 바탕을 둔 정치적 충성심을 지역공동체로 회귀시키는 경향으로 나타났으며, 공간적으로는 각각의 지역공동체가 중심이 되는 지방적(local) 현상으로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지역주의의 정치적 지향은 분리나 자치를 지향하는 운동의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매우 동질적인 언어, 인종, 혈연적 기초위에서 일찍이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확립된 한국의 경우 원형적 지역성은 매우 미약한 것이었다. 적어도 고려시대 이후에는 호남이 문화적으로 분명하게 구분되고 분권화된 통치공간을 갖춘 지역공동체를 형성하지도 않았으며, 근대이후의 사회체계나 정치체계에서 호남이란 지역이 기능적으로 구분되는 위치를 갖는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한국의 호남이란 원형적 지역성이나 지역공동체의 존재 때문에 지역균열의 분획선이 그어진 것도 아니고, 그러한 분획선이 호남과 비호남 사이에 그어질 객관적, 논리적 필연성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에서 비호남출신들이 호남출신을 기피하고 차별하는 이유로 지적해 온 ‘호남민의 타고난 인격적 특질’이란 편견이자 허위의식이며,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호남의 지역성이 반호남지역주의의 형성에 있어 전제적 조건이거나 필수적 조건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소외의식에 기반을 둔 호남의 지역주의 역시 호남이 갖는 지역성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의미한다. 오히려 호남의 소외의식에 앞서 반호남의식이 형성되었고 이러한 반호남의식이 지배와 통치의 계기와 결합된 편견과 이데올로기의 문제라면,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형성된 호남의 지역주의는 비호남의 반호남주의와 같은 차원으로 대비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의 지역주의를 비지역적 차원에서 파생된 균열로 보는 것은 지역주의 현상의 변화를 설명하는 데에도 의미를 갖는다. 4장과 5장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지역주의 문제의 초점은 계속해서 변해왔다. 예컨대 영남지역의 투표행태는 끊임없이 대구-경북과 부산-경남으로 분할과 통합을 반복해왔을 뿐 아니라 한 정당의 득표 독점성도 끊임없이 유동하였다. 지난 2000년 선거 이후 충청권은 대체로 3당체제에 가까운 결과를 보였다. 호남권 역시 2004년 총선 이후, 특히 2006년 지방선거에서 양당체제적 경향을 발전시켰다. 아마도 가장 극적인 변화는 2004년 총선에서 호남지역의 선거시장을 독점했던 열린우리당이 그 이후 지배력을 상실한 사례일 것이다. 한국의 지역주의가 갖는 2차적인 균열의 성격을 이해하지 않는 한 이러한 변화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앞으로도 지역주의의 정치적 표현은 권력관계적 계기가 변화함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거나 새로운 내용으로 구성될 것이다.
한국의 지역주의를 2차적 균열로 정의하는 것은 규범적 차원에서도 중요하다고 본다.  그것은 민주화 이후 한국정치를 지역주의라는 틀 속에서 해석하고 다른 차원의 문제를 지역주의로 용해시키는 접근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역주의 극복 없이는 아무 것도 안 된다며 뭔가 특단의 조치를 통해서라도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 실제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의 전략적 의도를 갖는 정치동원의 한 양식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지역감정’ 때문에 문제이고 ‘지역감정의 해소 및 지역간 화해협력’에서 규범적 대안을 찾는 한국사회의 지배담론뿐 아니라, ‘호남의 역사적 한’, ‘고려(혹은 삼국시대)이후의 중심-주변관계의 연장’ 등 지역주의의 역사적 연원을 과도하게 강조하거나, ‘구조화된 지역대립구조’, ‘지역지배체제’ 등 지역주의의 사회적 기초를 과장해온 주장들 역시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롭기는 어렵다. 지역을 사회의 기능적 분화에 따라 새로운 집단적 정체성으로 대체될 수 없는 하위문화의 특성(김만흠 1991; 1996)을 갖는다거나, 중심-주변의 사회관계를 반영하는 “신분이나 계급과 같은 의미”(남영신 1991; 김만흠 1991; 황태연 1997)로 해석하는 것도 문제가 많다. 한국의 지역주의를 다문화로 분절화된 사회의 지역주의로 과장해서는 안 될 것이다.
기존 연구의 초점은 변화되어야 하고 그와 함께 지역주의에 대한 성격규정과 기존의 설명모델도 수정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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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지웅
박상훈 박사님 안녕하십니까? 예전 강론회에 함께 했던 홍지웅입니다. 최근 정당체제 관련문헌을 읽던중 박상훈 박사님의 "한국 지역정당체제의 합리적 기초에 관한 연구"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만들어진 현실]에서도 중요하게 언급되어질 내용 같은데요^^. 특히 위 논문에서 '지역주의 투표결정 모델'즉 기대효용함수로 대안집합을 이끌어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투표결정의 변화를 설명하는 부분이 흥미로웠습니다. 그런 연유로 이 연구방법론에 관한 참고문헌이나 기본서로 삼을만한 텍스트가 있는지 문의드리는 바 입니다. 2009-04-23
16: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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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목록  |  편집일기 (145)  |  신간이야기 (139)  |  제작일지 (51)  |  한 줄 인용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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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43 2009-06-03
47 신간이야기
  <냉전의 추억 2> 일본의 저항가요가 된 <임진강>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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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52 2009-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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