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의 추억 3: 머릿말> "냉전의 기억이 평화의 길로 인도하리라...

2009-06-03 19:45:25, Hit : 4743

작성자 : 끄로마뇽
<냉전의 추억>(가제)의 머리말을 미리 올립니다(추후 수정될 수도 있습니다).
이 책은 한겨레 21에 그간 연재했던 글들을 재구성한 것으로 냉전의 스물 네 장면을 풀어내고 있습니다. 다음의 머리말에도 있듯이, 지금 생각하면 일견 우스꽝스럽지만 슬픈 냉전의 블랙코미디를 따뜻하고 안타까운 시선을 담아 버무려 내고 있지요. 필자는 북한 전공 연구자일 뿐아니라, 남북 교류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남북 공존의 길을 묵묵히 걸었던 사람들과 역사적인 순간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과정에서 만났던 이산가족 할아버지, 할머니, 현대 아산의 말단 직원들... 선을 넘어 길을 만든 사람들의 눈물에 대해서도 '힘내라'고 응원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책을 보면서 한반도에 '평화'라는 것이 이렇게 이렇게 만들어져 왔구나... 다시 돌아가서는 안되겠구나...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이해하게 되는 건 왜일까요? 여러분도 잊고 있던 기억들을 들춰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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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말
                
                                                 냉전의 추억, 그리고 평화의 미래





해가 지고, 달이 뜨는구나. 그래, 이것이 달빛 정책이구나. 금강산 가는 길이 끊기고, 그 길에는 잡초만 무성하다. 철마는 다시 꿈을 꾸고, 북으로 가는 철로는 녹이 쓸겠지. 개성 공단도 문을 닫고 있구나. 그리고 이산의 한을 가슴에 품은 사람들이 세상을 뜬다. 달이 뜨니, 스산한 바람이 불고, 늑대가 울부짖는다.



눈물

몇 년 전 하와이에 갔을 때, 어떤 할아버지를 만났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있던 그 즈음에 식민지의 청년으로 하와이에 공부하러 왔단다. 공습이 있은 후 일본인들은 테러의 대상이 되었다. 식민지 청년도 얻어맞았다.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이라고 외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원통하고 억울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해방이 되고, 전쟁이 났다. 청년은 이를 악물고 공부해서 의학박사 학위를 땄다. 그러나 그는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고향은 이북인데 그곳은 사회주의가 되었고, 이남은 일가친척이라고는 없는 타향이었다. 그리움을 삼키며 이국의 땅에서 청춘을 보냈다. 80대 후반으로 접어든 할아버지는 참았던 그리움을 쏟아 내며, 죽기 전에 고향에 한번 꼭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산가족들의 사연, 어느 것이나 그 자체가 대하소설이고 한편의 드라마요 슬픈 영화다.  
냉전은 눈물의 추억이다. 깊은 슬픔의 기억이다. 임진강에 다시 눈물이 흐른다. 강 넘어 북녘 땅을 바라보는 늙은 아들의 주름진 눈가로 오늘도 그리움의 강물이 흘러내린다. 1985년 첫 번째 이산가족 만남, 그리고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의 짧은 상봉들, 눈물로 시작해서 눈물로 끝났다. 만나서 울고, 분단의 세월을 확인하며 울고, 다시 헤어져야 하는 현실에 울었다. 남북 관계가 중단되면서, 그리움에 지친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이 멀어져 가고 있다. 임진강에는 오늘도 한숨이 안개처럼 퍼진다.
감격의 눈물도 있었다. 1991년 일본 지바에서 코리아 여자 탁구가 우승했다. 시상대에 한반도기가 올라가고 “아리랑”이 울려 퍼졌다. 남과 북은 하나가 되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날 관중석의 민단과 조총련도 하나였다. 고국처럼 38선이 그어진 일본에서 그날만큼은 눈물의 통일, 감동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그날의 기억 때문인지 2008년 3월 상하이 월드컵 예선전 남북 대결에서 정대세의 눈물이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코리아 팀의 눈물과 정대세의 눈물, 그 의미의 차이가 답답했다. 감동의 눈물과 슬픔의 눈물, 통일의 눈물과 분단의 눈물, 어떻게 세월이 거꾸로 가는지 참으로 안타까웠다.
‘어떤 보수’는 한반도기가 좌파 정권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흰소리가 이 책을 쓰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망각의 선동에 맞서, 감격의 기억을 불러 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체육 회담의 역사를, 1991년 지바의 눈물을, 세계의 기립 박수를 받은 2000년 시드니,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공동 입장의 감격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길을 만든 사람들의 눈물도 기억하고 싶다. 현대아산 식구들이 금강산에서 흘린 눈물을, 개성 공단 중소기업 사장이 허허벌판에 공장을 짓던 날 흘린 눈물을, 남북 철도가 연결되던 날 늙은 기관사의 뺨에 흐르던 눈물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눈에 다시 절망의 피 눈물을 흘리게 할 수는 없다.    



웃음, 그러나 블랙

2008년 겨울 파리에서, 유럽의 북한 연구자들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때 뉴질랜드 대학의 한 교수가 남북한의 문화 차이를 발표했는데, 2003년 남한의 댄스 그룹 ‘신화’와 ‘베이비복스’의 평양 공연 동영상을 소개했다. 무대 위의 화려한 댄스와 현란한 음악, 그러나 한복 입은 관객과 그들의 ‘썩소’, 모두들 웃었다. 그러나 필자는 웃지 못했다. 오히려 슬픔이 몰려왔다.
냉전의 세월이 흐를수록 문화의 차이도 커진다. 차이가 코미디의 소재로 사용되기도 한다. 웃긴다. 하지만, 그 웃음은 블랙이다. 1970~80년대 남북한의 문화 교류 현장에서, 남한 사람들은 북한의 촌스러움에 실소를 날렸고, 북한 사람들은 남한의 ‘서구적 퇴폐’에 눈살을 찌푸렸다.
접촉은 이해의 첫걸음이다. 2000년 정상회담을 거치면서 접촉이 활성화되었다. 충돌도 발생했다. 오해에서 이해로 가는 길은 평탄하지 않다. 나의 경험에서 남북 접촉 5단계 설을 만들어 보았다. 첫 번째 만남은 호기심이다. 분단의 반쪽에 대한 설렘이 왜 없겠는가? 두 번째는 실망이다. 차이에 대한 분노의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세 번째는 설득과 충돌이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변해야 한다고, 그렇게 말하다 충돌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네 번째는 체념이다. 너는 너의 길을 가고 나는 나의 길을 간다, 뭐 그런 감정이다. 이 단계를 지나야 다섯 번째의 경지에 오른다. 그것은 공존이다. 차이를 인정해야 공존의 길이 보인다. 더불어 엉키다 보면, 자연스러운 상호 변화가 이루어진다. 이것이 나의 체험적 이론이다. 주변 사람들의 북한 접촉 과정을 보면, 대체로 맞는 것도 같다.
그렇다. 공존의 시각이 필요하다. 남북한의 화해 협력이 이루어지면서, 분단을 다루는 시각도 다양해졌다. 대결의 시대는 지났다. 더욱 다양한 시선으로 분단 문제를 다루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 책을 썼다. 특히 젊은 세대와의 공감, 남북 관계를 연구하는 사람 입장에서 어렵지만 반드시 해야 할 숙제라고 생각했다. 이 책에 나와 있는 냉전의 블랙코미디가 더 많은 영화나, 문학의 소재가 되었으면 한다. 분단이 인생을 앗아간 조작 간첩 사건들, 무능이 빚어낸 대북 정책의 좌충우돌 풍경, 문화 현장에서 부딪히는 낯선 신랄함, 그리고 주는 사람의 생색과 받는 사람의 불쾌가 어우러진 슬픈 웃음의 장면들, 어색하고 유치한 경쟁의 시대, 우습지만 슬픈 냉전의 풍경이다.  



성찰

냉전을 추억하는 것은 성찰을 위해서다. 기억은 때론 고통이고, 망각이 치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리고, 시시비비를 가리면서 감정이 상할 수도 있지만, 기억의 의지는 오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각오다. 경험이 지혜를 낳고, 과거를 보면 미래가 보인다. 가지 말아야 할 길이 있고, 힘들지만 가야 할 길이 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거린다. 다시 풍자의 시대인가? 앨빈 토플러는 남한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시간을 사는 사람들”이라고 했던가? 그러나 대한민국은 1950년대의 시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지배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하기야, 녹색 삽질의 시대에 젊은 수구 또한 왜 없겠는가? 냉전의 풍경들이 다시 살아나고, 증오의 말들이 넘쳐 난다.
한반도의 화해와 협력으로 가는 기차가 멈추었다. 기차가 뒤로 달린다. 낯익은 풍경들이 스친다. 역주행에서 마주치는 풍경, 이럴 수는 없는데. 때맞추어 나타난 기억의 암살자들이여.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 이들은 분단을 아파하기보다 자랑스러워한다. 분단 정부가 수립되는 날을 ‘건국절’로 기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망각의 선동이다. 그러나 과거로 고속 후진하는 기차가 망각의 터널로 들어갈 수 있을까? 아니다. 또 다른 기억을 불러오고 있다. 어디서 본 듯한 풍경들, 살아 있는 기억이다.    
1984년 전두환 정부가 북한의 수해 물자를 받고, 남북 경제회담을 추진하고, 정상회담을 할 뻔했던 시기부터 따지면 대체로 10년 대화, 5년 대결의 주기가 펼쳐진다. 노태우 정부 시기까지의 남북 기본 합의서 국면이 지나자, 김영삼 정부의 ‘잃어버린 5년’이 나왔고, 그리고 다시 10년에 걸친 화해 협력의 세월이 이어졌다. 다시 5년간의 달빛 정책이구나.
설마 냉전 시대로 돌아가겠어? 모두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기억과 현실의 오버랩을 우리는 보고 있다. 잊어버린다고, 부정한다고, 분단의 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보고 있는가? 증오의 말들이 가져온 한반도의 먹구름을. 보고 있는가? 무관심이 가져온 역사의 후퇴를. 보고 있는가? 평화를 만든 사람들의 안타까운 눈물을.
달빛의 폐허 위에서 햇볕이 떠오르리라. 아파 본 사람이 건강의 소중함을 알듯이, 비온 뒤에 땅이 굳듯이, 냉전을 추억하며 평화의 미래를 그려본다. 한반도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분단을 고민했으면 한다. 증오가 사라지면 전쟁이 끝나듯, 오해를 넘어서면 공존이 가능하듯, 분단의 기억들이 평화의 길로 인도하리라.  

선을 넘어 길을 만든 사람들을 추억하며
평화의 기억으로 통일 시대를 열,
젊은 청춘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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