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간 맛뵈기]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2011-07-21 17:20:26, Hit : 4095

작성자 : 끄로마뇽
- File #1 : downsizing_democracy.jpg(12.6 KB), Download : 192

막바지 작업이 한창인 책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Downsizing Democracy, 가제)의 서문을 맛뵈기로 올려드립니다.
대중민주주의가 개인민주주의로, 시민이 고객으로 해체되는 현실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문제의식도 선명하고 꽤 재미있습니다. 특히 서문의 말미에, 9.11테러 이후 부시 대통령이 시민들에게 했다는 말 공감이 갑니다. ^^
--------------------------------------------------------------------------------------

서문


평범한 시민들은 2백여 년이 넘도록 서구 정치 무대의 중요 행위자였다. 18세기에 그들의 전위부대는 세계 전역에 총성을 울리며 민첩하게 대중 징집에 응했고, 성공적으로 정치적 삶의 공간을 열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수천만이 넘는 시민들이 유권자, 시민군, 납세자, 배심원, 그리고 시민 행정가로 충성스럽게 봉사했다. 시민들은 서구가 세계의 많은 지역을 정복할 수 있도록 행정력, 강제력, 인적・물적 추출 능력을 제공했던 국가의 중추였다.

시민들은 그 보상으로 법적 권리, 연금, 그리고 잘 알려진 바대로 투표권을 포함한 다양한 혜택을 받았다. 투표권의 역사는 종종 고통스런 대중투쟁의 결과로, 원하지 않던 지배자들로부터 정치 참여의 기회를 쟁취하는 과정으로 기술된다. 하지만 이런 봉사와 혜택 사이의 암묵적 교환은 시민들을 더 깊고 완전한 정치적 삶으로 이끌었다. 시민 행정가들은 활력 있는 정당 조직의 대들보가 되었다. 수천만의 평범한 시민들이 정부의 세입 기반으로 포함되면서, 대중의 순응을 장려하고 이해 갈등을 중재할 대표 제도와 정치제도의 힘도 함께 커졌다. 국가가 시민군에 의지할수록 참여의 경계도 넓어졌다. 싸워야 할 시민들이 투표할 권리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가 평범한 시민의 지지와 협력에 의존했던 것은 대중의 정치 참여를 넓히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제 시민의 시대는 끝나 가고 있다. 오늘날 서구 국가들은 평범한 시민들의 참여 없이도 군대를 모으고 세금을 걷고 정책을 집행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이런 근본적인 변화는 정치 엘리트들이 대중의 정치 참여에 의지하지 않고 권력을 유지하며 행사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어떤 면에서 이런 변화의 징후는 미국에서 가장 뚜렷하다. 미국에서는 일반 시민이 정치의 변방으로 밀려나면서 60년 이상 투표율이 하락했다. 건국 초기 예외적일 만큼 인상적이었던 민주주의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의 정치 엘리트들은 유권자 대중을 주변화했고, 목표 달성을 위해 점점 더 법원과 관료에 의존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런 경향을 대중민주주의와 구분하여 ‘개인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대중민주주의는 정치의 장을 장악하기 위해 엘리트들이 비엘리트들을 동원해야 했던 방식이었다. 반면 현재의 경향이 개인적인 이유는 통치의 새로운 기술들이 대중을 사적 시민들의 집합으로 해체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경험은 집단적인 것이 아니라 점점 개인적인 것이 되어 가고 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평범한 미국인들은 시민에서, 워싱턴에서 종종 ‘고객’이라고 불리는 존재로 변해 왔다. 이 ‘고객들’은 집단으로 정치과정이나 통치 과정에 참여하도록 권유받지 않는, 정부 서비스의 개별 수혜자들이다. 예컨대 미국 전 부통령 앨 고어(Al Gore)의 ‘연방 정부 성과 평가 위원회(이하 평가 위원회)’의 보고서(National Performance Review, NPR)를 보자. 평가 위원회는 정부에 대한 ‘기업적’ 접근 때문에 공화당 의원 대부분이 승인했던, 클린턴 시기 몇 안 되는 제도 가운데 하나다. 보고서는 미국 국민을 언급할 때 ‘시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정부 서비스의 ‘고객들’로 간주한다. 보고서는 제2장 “고객을 우선에 놓기” 서문에서, “많은 사람들은 연방 정부에 고객이 있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에게는 고객이 있다. 바로 미국 국민들이다.”라는 고어의 말을 인용한다. 시민이 고객으로 변형된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과거 시민들은 정부를 소유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반면 고객은 정부로부터 쾌적한 서비스를 받는 존재로 간주될 뿐이다. 게다가 시민들은 공공의 목적을 위해 창조된 집단적 존재로,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들이다. 하지만 고객은 시장에서 개인적 필요를 충족하려는 개별 구매자들이다. 고객으로서의 경험에는 집단 이익을 달성하기 위한 집단 동원이 존재하지 않으며, 이는 단지 포토맥 강[워싱턴 정가]을 따라 흐르는 일시적 유행의 문제가 아니다. 공무원들은 고객 친화적 성향을 유지하기 위해 항상 친절하고 좀 더 ‘이용자 친화적’이 되도록 교육받는다. 공공 기관들은 고객 친화적 환경을 조성하고 고객 만족도 조사를 실시해야 한다. 하지만 평가 위원회 보고서는 고객이 연방 정책의 내용과 집행에 실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2000년 대통령 선거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련의 상황에서 미국 시민의 역할이 퇴조하고 있음은 훨씬 더 명백해졌다. 전국 뉴스 미디어들은 소위 여론전이, 플로리다 선거인단 25명의 투표 결과를 둘러싼 법 제도 투쟁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명백한 거짓이다. 각 후보들이 언론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알리려고 수십 명의 대리인을 고용했다는 점에서 여론을 완전히 무시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후보들 가운데 누구도 대중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확실히 어떤 후보도, 대규모 시위와 저항을 조직하라는, 제시 잭슨 목사 같은 정치 활동가들의 요구에는 관심이 없었다. 두 후보가 간헐적으로 대중에게 얼굴을 비친 것은 대중의 열정이 일어나길 바라고 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진정 원했던 것은 중요한 정치 동맹 세력들이 결심을 굳히고, 돈 많은 후원자들이 수천만 달러에 이르는 비용을 대기 위해 지갑을 여는 것이었다. 앨 고어와 조 리버만(Joe Lieberman)은 대중에게는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면서, 매일 정치자금 기부자들과 전화 통화하는 데 오랜 시간을 보냈다. 공화당 자금 담당자들도 마찬가지로 미국 전역에서 모금 활동을 벌였다. 앨 고어는 그 전쟁에서 대중의 역할이 미미함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었다. 11월 28일, 대선에서 여론의 역할을 묻는 텔레비전 리포터의 질문에 대해, 고어는 “나는 이 문제에서 [여론이] 중요하지 [않다고] 확신한다. 이것은 법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라고 답했다. 그의 이런 대답은 선출직 공직 후보자의 입에서 나온 상당히 중대한 발언이었다.  

플로리다 전투 과정에서 미디어는 두 정당 간 총력전이 평화적으로 해결되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역설했다. 물론 다른 나라라면 있었을지 모르는 탱크나 군대는 거리에 없었다. 부통령 관저 밖에 수십 명에 불과한 시위대가 서있었을 뿐이다. 전국 미디어들은 정치적 열정의 부재를, 미국 민주주의의 성숙과 법의 지배에 대한 미국인들의 깊은 존중을 표현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집권을 위한 투쟁 과정에서 대중의 정치 정서가 드러나지 않고 어떤 종류의 대중 정치 행위나 저항도 거의 없었다는 것이, 정치적 안녕의 징후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사실은 정확히 그 반대다. 집권 경쟁에 수백 명, 기껏해야 수천 명의 정치 지도자와 활동가들만이 참여했을 뿐이다. 아마 또 다른 수십만 명은 텔레비전에서 그 전투를 관전했거나 정기적으로 신문 기사를 접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플로리다 전투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여론조사 결과가 암시하듯이 그들은 어떤 결과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고 실제로 그러했다. 대중이 자신의 감정을 거의 표현하지 않았고 시위자들도 거의 없었던 건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미국인들이 그만큼 성숙해서가 아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투쟁에 자신들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의 정치과정에서 시민의 중요성이 감소하고 있다는 더 강한 확증이 필요하다면, 9・11 테러 공격 이후 뉴욕과 워싱턴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보라. 부시 대통령은 자신의 계획을 알리면서 국민들에게 두려움을 가라앉히라고 했고, 시민들에게 위기에 직면해 자신의 본분을 다하라고 요구했다. 대통령이 평범한 미국인들에게 지정한 본분이란 정확히 무엇일까? 우리는 애국가를 부르고 애국적인 생각을 하며, 무엇보다 쇼핑을 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다른 말로 하면, 정부는 시민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시민들은 경제나 부양하고 방해되지 않게 얌전히 있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다는 말이다. 2백 년도 더 전에 미국인들은 전 세계에 총성을 울리며 정치의 장에 들어섰다. 오늘날 그들은 신용카드를 움켜쥔 채 정치의 장에서 밀려나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 같다.


cpkjmt
tDl13H , [url=http://pcbdudlzvxxz.com/]pcbdudlzvxxz[/url], [link=http://xfyhvbkhcdhm.com/]xfyhvbkhcdhm[/link], http://ljehjyiwjrql.com/ 2011-12-03
01:42:36

수정 삭제
dsihzxku
5RJ9vL <a href="http://myihqrrrlygn.com/">myihqrrrlygn</a> 2011-12-01
22:32:20

수정 삭제
Dillian
If you're reading this, you're all set, prander! 2011-12-01
01:03:44

수정 삭제



전체목록  |  편집일기 (145)  |  신간이야기 (139)  |  제작일지 (51)  |  한 줄 인용 (13)

 
251 한 줄 인용
  <시간의 목소리>에서_ 4. "상실"   14
 윤상훈
4377 2011-07-25
250 한 줄 인용
  <시간의 목소리>에서_ 3. "맥주"   2
 윤상훈
4149 2011-07-22
편집일기
  [근간 맛뵈기]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3
 끄로마뇽
4095 2011-07-21
248 신간이야기
  쉿, 근간 <나는 라말라를 보았다>와 바렌보임의 베토벤 
 끄로마뇽
3752 2011-07-21
247 한 줄 인용
  <시간의 목소리>에서_ 2. "밤의 지하실"   7
 윤상훈
4157 2011-07-19
246 신간이야기
  신간 <노동계급 형성과 민주노조운동의 사회학> 리뷰.   13
 未貞
3549 2011-07-19
245 신간이야기
  <시간의 입> → <시간의 목소리>가 곧 나옵니다.   9
 윤상훈
4517 2011-07-18
244 편집일기
  『소금꽃나무_한정 특별판』을 출간하며... 
 관리자
3941 2011-07-05
243 한 줄 인용
  <시간의 입>에서_ 1. "폭우"   7
 윤상훈
4492 2011-06-23
242 신간이야기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시간의 입>이 곧 나옵니다.   18
 윤상훈
4140 2011-06-21
241 신간이야기
  출간 임박! <기생충, 우리들의 오래된 동반자>   25
 끄로마뇽
4857 2011-05-03
240 편집일기
  학생인권조례 서명 동참을   3
 펀짱
3609 2011-04-29
239 신간이야기
  <기생충 이야기3> 곱등이 친구 연가시 
 끄로마뇽
4762 2011-04-27
238 신간이야기
  <기생충 이야기2> 대변 발사   1
 끄로마뇽
4219 2011-04-22
237 신간이야기
  <기생충 이야기1> 가장 보편적인 생물   6
 끄로마뇽
4687 2011-04-21

[1][2][3][4][5][6][7] 8 [9][10]..[24]